
해마루
[키리바쿠] 열대야와 눈사람
장마철이었다. 녹음이 우거진 풍경에 물기가 어렸다. 바쿠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어두워지는 풍경에 한숨만 나왔다. 세 시간째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바쿠고였다. 아무것도 써지지 않았다. 창문을 향한 고개를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돌리자 원고 대신 보고 있던 이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 바쿠고. 나는 지금 첫눈을 맞고 있어.]
제목 없이 도착한 이메일, 한 장의 사진. 몇 번을 다시 창을 열고 닫아봐도 키리시마가 보낸 것은 사진 한 장과 글 한 줄이 다였다. 첫눈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미 하얗게 눈이 쌓인 풍경은 낯설었다. 지금은 7월이었고, 찜통에 들어온 만두가 된 것처럼 바쿠고는 천천히 익어가는 중이었다. 에어컨은 고장 났고, 말도 없이 사흘 전에 사라져버린 남자친구 때문에 없던 열도 올라올 것 같았다. 이러다 열이 나서 앓아 누우면 마감은 못 지킬 거고, 아무리 바쿠고의 더러운 성질과 익숙한 출판사라고 해도 6월에 끝나간다고 했던 원고가 7월 중순까지 마무리 되지 않는다면 화를 내겠지. 바쿠고는 이럴 때에도 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또 역설적으로 마음에 들기도 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냐]
물음표를 쓰려던 바쿠고는 이메일을 지웠다. 아직 화는 풀리지 않았다. 그건 바쿠고도 키리시마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지난주, 원고에 파묻혀서 끙끙 앓던 바쿠고를 달래고 달래서 데이트를 하던 키리시마는 바쿠고에게 처음으로 화를 냈다. 글 말고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거냐고. 바쿠고는 차마 사과를 하지 못했다. 바쿠고에게 글을 쓰지 않는 것은 물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고, 하루에도 몇 번씩 들고 다니는 작은 수첩에 – 사실 이 수첩도 키리시마가 선물해준 것이지만 – 8년째 쓰고 있는 볼펜으로 단어와 문장을 써내려가곤 했다. 심지어 키리시마가 처음으로 화낸 그 날 밤에도, 홀로 침대에 엎드려 글을 썼다. 그 중 반은 키리시마에 대한 미움을 담은 글이었고, 나머지 반은 키리시마에 대한 글이었다. 어떤 감정인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채, 바쿠고는 키리시마를 썼다. 키리시마는 바쿠고가 글만 쓴다고 화를 냈다. 그리고 바쿠고는 어느 순간부터, 키리시마에 대해서만 글을 썼다.
[오늘밤 최저 기온 27°C]
바쿠고가 고심 끝에 고른 단어들로 답장했다. 바쿠고는 사흘 동안 제대로 글을 쓰지 못했다. 어쩌면 사흘 동안 제대로 물을 마시지 못해서 이렇게 더운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사흘 동안 키리시마가 물을 챙겨주지 않아서 목이 마른 것일지도 모른다. 바쿠고는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베란다의 온도계를 확인했다. 27°C. 밤의 최저기온이 25°C가 넘으면 열대야라고, 바쿠고는 언젠가 소설을 위한 자료조사를 하다가 읽은 적이 있었다. 오늘은 지독한 열대야였다. 일본은 십 수 년 만에 가장 뜨거운 여름을 맞이했고, 북반구 전체가 지구온난화 때문에 더운 여름에 시달린다고 오늘 아침 뉴스에서 나왔다. 키리시마가 어디에 있던, 그곳이 북반구가 아님은 확실했다.
“키리시마.”
바쿠고는 전송 버튼을 누르고 신경질적으로 노트북을 닫았다. 탁- 소리가 넓은 거실에 공허하게 울렸다. 소파 위에서 만화책을 보며 과자를 먹을 때 과자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아령을 들며 숨을 점점 더 몰아쉬는 소리, 곤히 잠들어 있을 때 나는 규칙적인 숨소리. 작은 소음들이 없는 거실이 괜히 쓸쓸해서 바쿠고는 터덜터덜 침실로 들어가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어디까지 가버린 거야.”
키리시마가 지친 것처럼 한숨을 쉬는 모습은 본 적 있다. 화가 나서 얼굴을 쓸어 올리며 금방이라도 폭언을 쏟아낼 듯 입을 벌린 순간까지 봤다. 그래도 한 번도 나한테 화를 낸 적은 없었는데. 바쿠고는 자조했다. 1년 연애를 했다. 길다고 하기에도, 짧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을 함께했다. 하지만 질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바쿠고는 억지로 눈을 감아봤다. 잠깐 머리를 식히러 가버린 거일거야, 분명히. 바쿠고는 단 한 순간도 키리시마가 첫눈을 맞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바쿠고는 키리시마가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키리시마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고, 자신에게는 더더욱 그럴 리가 없었다. 참고, 침묵해도, 입을 연 순간에는 진실만을 말했다. 그러니 화낸 것도, 지금의 이메일도 사실이겠지. 바쿠고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키리시마는 오늘밤에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고, 자신은 오늘 혼자 잠들어야만 한다. 잠들기 전 일기장에 키리시마에 대한 원망과 약간의, 아주 약간의 미안함을 써볼까 했던 바쿠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키리시마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이틀 동안 지겹도록 썼다.
마른 눈을 비비자 눈이 따갑게 아파왔다. 상념과 상념을 물리치고 겨우 잠들었는데 보람도 없이 일찍 깼다. 아침 일곱 시. 평소에는 일부러 일어나려고 해도 일어나기 힘든 시간이었다. 키리시마가 출근준비를 하려고 바스락거리고, 바쿠고는 이불 안으로 더 파고 들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시간이었다. 평소라면 바쿠고를 쓰다듬고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깨우려고 하는 키리시마가 없었다. 맨날 글만 쓰냐고 화내고 사라진 키리시마. 키리시마가 없을 때 글이나 써야지. 그가 없어진 지 나흘째였다.
부스스한 머리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노트북 뚜껑을,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키리시마가 노트북을 그렇게 거칠게 다루면 고장 날 거라고 몇 번이고 잔소리를 했었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바쿠고는 물건을 대체로 거칠게 다뤘다. 주로 고장 날 일 없는 물건, 펜이나 종이를 다루니까 상관없었지만 노트북은 달랐다. 너무 세게 잡아서 부담을 줘서도, 너무 약하게 잡아서 놓쳐버려서도 안 되는 것들이 있었다. 물건을 다룰 때 바쿠고는 전자, 사람을 다룰 때는 후자였다. 그 방법이 잘못돼서 둘 다 고장내버렸다고, 바쿠고는 자조했다.
원고를 열어놓고 벌써 움직임도 없이 15분째. 참을 수 없었던 바쿠고는 이메일을 다시 확인했다.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바쿠고는 무기력하게 눈을 감았다. 먼저 전화를 해봐야하는 것인지, 그냥 기다려야하는 건지 사실 몰랐다. 바쿠고가 쓰는 소설의 주인공은 사랑 때문에 고민하지 않았다. 바쿠고가 사랑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곁에 있고, 손끝이 닿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져서 살포시 웃어버리는, 그런 사랑을 했다. 바쿠고의 가까운 지인들은 바쿠고의 소설을 읽어보면 매번 놀라곤 했다.
“이걸 네가 썼다고?”
바쿠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화를 내지도 쑥스러워하지도 않는 모습에 지인들은 더 놀랐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내가 사랑 이야기를 썼더라.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뻔한 답이 있었지만, 바쿠고는 설마 자신이 그 뻔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밤도 어김없이 열대야였다. 바쿠고는 소설의 주인공과 사랑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키리시마를 생각했다. 바쿠고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키리시마는 사진을 찍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키리시마의 사진까지 다다른 바쿠고는 오랜만에 키리시마의 사진을 보기로 했다. 어차피 아직도 오후였다.
키리시마는 의외로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지 않았다. 다른 일에 관해서는 바쿠고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이면 오래 차를 타다가 여행지에 도착해 신이 난 아이처럼 싱글거리며 바쿠고에게 설명을 했다. 그런데 가장 큰 취미인 사진에 관해서는 과묵했다. 딱히 사진이나 카메라를 숨기지 않았지만, 먼저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가끔 놀러 가면 진지하게 입을 다물고 렌즈 너머의 풍경을 응시하며 사진을 찍는 모습에 괜히 마음이 흔들려서 아무 말도 안하고 사진을 찍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사진첩은 책장의 가장 위에 있었다. 무리 없이 사진첩을 꽂고 빼던 키리시마와 달리 바쿠고는 약간 발꿈치를 들어야했다. 무거운 사진첩을 소파 위에 내려놓은 바쿠고는 사진첩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바쿠고의 얼굴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크기로 인쇄되어있었다. 바쿠고는 얼굴에 열기가 확 몰리는 것이 느껴져서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평범한 풍경 사진만 몇 장 있었다. 내심 조금 실망한 바쿠고는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반 정도는 바쿠고 사진, 반 정도는 다른 사진이었다. 대부분은 언제 찍었는지 알 수 없는 사진들이었다. 키리시마가 집에서 사진을 찍었던가. 바쿠고가 글을 쓸 때 찍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사진첩에 가득한 자신의 얼굴을 보던 바쿠고는 사진첩을 닫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바쿠고는 더워져서 에어컨의 온도를 더 내렸다.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놨는지 조금 추운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바쿠고는 온도를 올리는 대신 이불로 몸을 덮고 수첩을 꺼내 단어 몇 개를 끄적였다. 에어컨, 추위, 겨울, 눈. 첫눈. 첫눈을 맞는 키리시마. 바쿠고는 문득 그립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눈사람.]
적당히 늦게 일어난 닷새째의 아침. 일어나자마자 이메일을 확인한 바쿠고는 웃었다. 아무 설명도 없이 역시 사진 한 장, 이번에는 단어 한 개. 그런데도 이상하게 웃음부터 나왔다. 커다랗고 동그란 눈을 갖고 있고 모자가 빨간색인 눈사람이 키리시마랑 참 닮은 것 같았다. 어제 저녁부터 이상하게 계속 키리시마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우연히, 갑자기, 문득, 어쩌다, 뜬금없이. 이 모든 말들은 바쿠고의 머릿속의 ‘그립다’를 수식하고 있었다.
“보고 싶다.”
키리시마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장마철인데 바쿠고는 말라가고 있었다.
새벽인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핸드폰을 켜서 날짜를 확인하자 벌써 여섯 번째 날이 되어 있었다. 확인하지 않은 알림이 한가득. 다시 핸드폰을 던져두고 바쿠고는 몸을 반쯤 일으켰다. 이쯤 되니 바쿠고는 슬슬 불안해졌다. 바보 같이 착한 키리시마는, 아예 떠난다는 말을 하지 못해 사진만 보내고 있는 게 아닐까. 헤어지자는 말을 글로 쓰면 안 될까봐,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렇게 침대에 누운 것도 아니고 벽에 기댄 것도 아닌 애매한 자세로 멍하니 있었다.
아침부터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핸드폰이 아니라 거실의 전화였다. 집전화로 전화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바쿠고는 심장이 더 강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설마. 달려가듯 거실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바쿠고.”
키리시마. 목이 메었다.
“비밀번호, 안 바꿨지?”
떨리는 웃음이 말끝에 베어 나왔다. 침묵이 이어졌다. 키리시마는 바쿠고의 침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긍정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일 돌아갈게.”
한참을 전화기를 들고 서 있었다. 바쿠고는 언제 전화가 끊겼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언제부터 자신이 울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 날 밤, 바쿠고의 일기장에 빽빽하게 써진 글씨가 번졌다. 마음이 사무치게 시렸다. 이제 안심해도 되는 거라고 수없이 스스로에게 되뇌면서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키리시마가 처음 사라졌던 날보다 더 빈자리가 커졌다. 하루가 지나는 사이에 점점 아픔이 커져온 것 같았다. 키리시마가 보고 싶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현관문이 열렸다. 초조하게 거실에 앉아있던 바쿠고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현관으로 달려갔다. 몇 초 후 문이 열리고 한 손에는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코트를,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든 키리시마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잠시간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깐 쉬고 왔어.”
“일 주일이 잠깐은 아닐 텐데.”
“화났어?”
키리시마는 언제나처럼 바쿠고의 기분부터 살폈다. 키리시마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잠시 화가 나고, 잠시 질렸지만 여전히 바쿠고에게 맞춰주는 키리시마였다.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묘한 희열감과 안도, 그리고 동시에 불안감도 피어올랐다. 다시 예전처럼 반복되어 돌아가 버리면, 언젠가 너는 다시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돌아오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 비행기가 예약 때문에 자리가 없어서.”
쑥스럽게 이야기하는 키리시마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얼핏 비행기, 호주, 눈, 겨울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집중할 수 없었다. 바쿠고는 키리시마에게 듣고 싶은 말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바보 같이 자존심을 지킨다고 하지 못했던 말, 나는 원래 이렇고 나를 바꿀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면서 하지 못했던 말. 다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원래대로’ 돌아가서는 안 됐다. 키리시마를 힐끔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숙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바쿠고는 이제야 하지 못했던 사과를 할 수 있었다.
“내가 잘못했어. 너를... 너한테 신경을 써야 하는 건데, 나만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제는, 이제는 안 그럴게.”
키리시마는 항상 바쿠고가 우선이었다. 바쿠고를 만나고 키리시마는 조금씩 달라졌다. 자주 연락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둘 다 직장이 있는 어른이니까 신경 써서 먼저 연락했다. 퇴근하고 피곤해도 옷을 예전처럼 던져놓지 않고 정리했다. 주말에 외출하면 바쿠고가 좋아하는 음식부터 찾았다. 이제는 바쿠고도 변할 차례였다. 이미 자기도 모르게 많이 변해왔지만, 조금 더 키리시마를 배려할 필요가 있었다.
“미안해.”
키리시마는 자신의 소매를 붙잡고 고개를 푹 숙인 바쿠고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말을 더듬는 것도, 망설이는 것도 바쿠고답지 않았다. 바쿠고는 지금 긴장하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키리시마는 바쿠고가 올려다보기 전에 바쿠고를 품에 안았다. 다정하게 바쿠고의 뒷머리를 쓸어주며 키리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쿠고는 그제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나도 말없이 사라져서 미안. 이제는 안 그럴게.”
서로를 끌어안고 토닥여주면서, 두 사람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있었다. 미안했다고, 이제는 달라질 거라고. 한참이나 그렇게 서서. 무더운 열대야인데도 서로의 온기가 불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