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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냐

 달려

 

 “나 육상할 거야.”

 나는 도시락 통에 코를 박고 달걀말이와 미트볼을 씹는 카미나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카미나리는 내가 뭐라고 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수저 없이 도시락 먹기에 집중하고 있다. 보다 못한 세로가 우유 곽에서 입을 떼고 카미나리 대신 내게 되물었다.

 “왜 갑자기?”

 “이기고 싶은 녀석이 생겼어!”

 “뭐지. 너무 근육 트레이닝을 많이 해서 뇌까지 근육이 되어버렸나.”

 평범하게 감기에 걸린 걸지도 몰라. 도시락 그만 처먹고 쟤 열 좀 재봐, 카미나리. 세로가 여상한 투로 심한 말을 지껄이는 데도 카미나리는 기어이 설익은 브로콜리까지 다 먹어치우고서야 “엉?” 하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지금까지 오고간 얘기는 하나도 듣지 못한 게 분명했다. 녀석은 코 위에 조그만 알루미늄 호일 조각을 올린 채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괜히 무안하니까 웃음으로 넘어가려는 게 분명했다.

 “육상부에 진짜 빠른 녀석이 있어.”

 “나 이 대사 엄청 많이 들어봤어. 뭐야, 그냥 어제 점프를 너무 많이 읽은 거 아냐? 키리시마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지금까지는 일방적으로 승부욕만 불태웠는데 이번엔 아예 육상부에 들어가겠대.”

 “뭐?! 안 돼! 그럼 나랑 같이 귀가할 사람이 없어지잖아!”

 “거기가 중요한 거냐고.”

 “아무튼 오늘 입부신청서 낼 거야.”

 “신입생도 아니고 2학년을, 그것도 여름 방학 직전에 받아주긴 한 대?”

 “응. 빠른 새끼기만 하면 된대.”

 “아. 말투만 들어도 알겠네. 바쿠고구나?”

 “걔 이름이 바쿠고야?”

 “엄청 유명하거든. 육상부 에이스에 2학년인데 부장이고 사진부 미도리야가 되게 비싼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걔만 엄청나게 찍어대니까. 우리학교 400m 릴레이, 원래는 지역 대회에서도 5등 정도였다던데 걔 들어온 뒤로 무조건 현 대회까지는 간다더라. 잘 달리긴 엄청 잘 달리는 모양이야.”

 “들으면 들을수록 네가 바보 같아 보여서 이 형은 눈물을 참을 수가 없구나, 키리시마. 그래. 굳이 네가 육상 천재의 발끝이라도 쫓아가기 위해 1년 반 남짓한 시간을 허비하겠다는데, 말릴 수는 없겠지.”

 “뭐, 좀 그렇지. 애초에 바쿠고가 키리시마 얘기 들으면 싫어하지 않을까. 엄청 순화해서 ‘육상 물로 보나, 이 새끼.’ 정도로 생각할 걸.”

 “얕볼 거면 당장 꺼져 아닐까? 그리고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대놓고 키리시마 앞에서 말할 것 같아.”

 “아아, 확실히 그러네.”

 “그만들 놀려. 나 진지하단 말이야.”

 나는 카미나리와 세로에게서 시선을 돌려 창 밖 너머를 바라보았다. 2학년 교실은 2층에 있어서 운동장이 제법 가깝게 보였다. 운동장 바깥에 깔린 우레탄 트랙은 한낮의 햇빛을 잔뜩 머금어 평소보다 더 시뻘겋게 보이는 것만 같다. 처음으로 녀석을 봤을 때, 녀석은 저 뜨거운 바닥에 양말만을 신은 발바닥을 올려놓고 가만히 서있었다. 이따금씩 세찬 바람이 불어 녀석의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았지만 녀석은 개의치 않았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시리도록 밝은 태양을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꺾어 우레탄 100m 트랙 저 너머를 오랫동안 바라보던 녀석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나는 아마 그 때 보았던 광경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다. 처음에는 녀석이 취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홀린 듯이 녀석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발끝에서부터 오싹한 기운이 타고 올라오고, 두피가 저릿저릿해서 아플 지경이었다. 바쿠고는 엉덩이를 털썩 우레탄 바닥에 붙이고 옆에 가지런히 놔뒀던 스파이크를 신었다. 그러고는 스프린트 자세를 취한 뒤 물 흐르듯 신속하고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새하얀 선 너머로 힘껏 발을 내딛는다. 녀석이 발바닥을 땅에 붙일 때마다 진한 그림자가 순식간에 우레탄에 드리워졌다 사라졌다. 녀석은 꼭 새 같았다. 얇은 운동복을 몸에 걸친 채 30cm쯤 되는 높이를 부드럽게 유영하는 아름다운 새.

 꼿꼿하게 세워진 등이 결승점에 도달한 뒤에야 나는 영문 모를 가슴의 벅차오름을 알아차렸다. 관자놀이에서 심장 소리가 들리고, 숨이 턱턱 막혀서 입이 절로 벌어졌다. 나는 제멋대로 거칠어진 호흡을 정돈하기 위해 애쓰며 생각했다. 뛰자. 뛰어야 한다. 저 등을 향해, 똑바로.

 “.......바쿠고처럼 뛰고 싶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본심에 흠칫하고 어깨를 떨자 카미나리와 세로가 내 양쪽 어깨에 손바닥을 올렸다. 아까와는 달리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다.

 “그건 괜찮네.”

 “롤 모델이라는 거지? 건전해서 좋네.”

 나는 아직 뜯지도 못하고 책상 위에 놔둔 단팥빵을 집어 올리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꼭 따라잡고 말 거니까, 바쿠고를!

 

 

 

 

 

 

 

 

 * * *

 

 

 

 “쓰레기네.”

 “캇쨩, 말은 가려서 해야지.”

 “쓰레기 같은 실력이네.”

 “전혀 나아지지 않았는데요?!”

 그럼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하지 뭐라고 해. 바쿠고는 그렇게 말하곤 자신의 뒷머리를 사정없이 벅벅 긁었다. 그 거친 손짓이 어지간히 짜증에 차보여서 나는 변명을 주워섬기려다 말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바쿠고의 말이 맞았다. 100m 베스트 타임 11초 6. 도저히 큰소리를 칠만한 기록이 아니다.

 “자세도 엉성하고 스타트 타이밍도 느려 터졌고.”

 “그거야 키리시마 군은 육상 초심자니까,”

 “아니. 그딴 건 저 새끼가 그렇게 좋아하는 근성으로 어떻게 된다고 치고 뭔가 이상하게 쓰레기야.”

 “가끔가다 캇쨩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니까......”

 그런 캇쨩도 멋지지만. 미도리야는 바쿠고보다 더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연속해서 셔터를 눌러댔다. 근접거리에서 터지는 플래시에 화낼 법도 한데 바쿠고는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미도리야의 촬영 세례를 견뎌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미도리야에게는 전혀 관심을 주지 않고 있는 거였지만 말이다. 바쿠고는 내 상반신부터 하반신까지를 꼼꼼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눈부신 플래시에도 찌푸려지지 않던 미간이 내 몸을 체크할 때는 몇 번이나 일그러져서 솔직히 엄청 풀죽었다.

 “야.”

 “응.”

 “어제 뭐 처먹었어.”

 “단팥빵 다섯 개랑 야키소바빵 세 개. 집에서 계란 8개 풀어서 계란찜 해먹었고.”

 “그제는.”

 “슈크림 빵 여섯 개랑 과자 두 봉지. 저녁으로는 교자 20개.”

 “식단이 쓰레기군.”

 바쿠고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산뜻한 톤으로 또 다시 쓰레기 발언을 했다. 아예 어깨를 늘어뜨리고 침울해있는데 바쿠고가 내게 종이 몇 장을 건네며 말했다.

 “일단 이 식단, 3주 지켜라.”

 “햄버그, 카레, 우유, 볶음밥, 프로틴, 야채절임, 콘 샐러드....... 프로틴이랑 우유는 그렇다 치고 나 요리 잘 못하는데.”

 “요리는 저 새끼가 한다.”

 바쿠고는 무례하게 검지로 카메라 렌즈 너머의 미도리야를 가리켰다. 갑작스럽게 지명을 받은 미도리야는 “어차피 캇쨩 거랑 같이 만들면 되니까.” 같은 태평한 소리를 했고. 나는 당황한 표정을 채 숨기지 못하고 미도리야에게 물었다.

 “미도리야 요리 할 줄 알아? 아니 그보다 미도리야가 바쿠고 식사를 매 끼 해 먹이는 거야?!”

 “응! 육상부 매니저직도 겸하고 있거든.”

 “아무리 그래도 식사 2인분을 3주나 책임지는 건,”

 “저 새끼도 꿍꿍이가 있어서 해주는 거니까 그딴 거 신경 쓰지 말고 네 쓰레기 같은 체력이나 신경 써.”

 바쿠고는 내 말허리를 끊어버리곤 그대로 등을 돌려 반대편 트랙 쪽으로 달려갔다. 반대쪽에서 여자 장거리반 반장이 바쿠고를 향해 타이머를 쥔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저렇게 입이 험하고 제멋대로인데 제대로 부장 일을 해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캇쨩 말이 맞아.”

 미도리야는 바쿠고가 달려간 방향을 바라보게 삼각대를 세우며 말했다. 나사를 조이고 카메라의 버튼을 조심스럽게 누르며 미도리야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최고의 여름을 찍고 싶거든. 캇쨩 옆에서 캇쨩의 부 활동을 돕다보면 분명 그 최고의 여름이란 걸 목도할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어. 캇쨩은 달릴 때, 진짜 가끔씩 빛이 나니까.”

 나는 미도리야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으며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항상은 아닌데 녀석의 달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심장이 덜컹하고 가라앉는 순간들이 있었다. 어둠이 순간 세상을 뒤덮었다 빠르게 사라지며 녀석의 주위가 새하얗게 물든다. 꼭 미도리야가 쉼 없이 터뜨리는 플래시처럼.

 “캇쨩은 자기 달리기만 소중히 여기는 게 아니라 단체전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키리시마 군의 영양 관리는 곧 캇쨩을 돕는 일이 된다는 거지.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아.”  

 “.......응.”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미도리야가 환하게 웃어 보이며 농담을 했다. 갑자기 진지해진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캇쨩은 갑자원에 데려가 달라는 귀여운 야구부 매니저 같은 소리 입 밖으로 내뱉지 마. 소름 돋으니까, 하고 엄청 싫어했지만!”

 “바쿠고다운 반응이네.”

 나는 미도리야처럼 밝게 웃어 보이며 저 멀리 키 큰 해바라기가 잔뜩 늘어선 화단 근처의 바쿠고를 쳐다보았다. 뭔가 열심히 여자 부원과 상의하고 있는 모습이 좀 귀여워 보인다. 여름. 여름인가. 확실히 바쿠고는 육상부원들에게 최고의 여름을 선사해줄지도 모른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나 시원한 공기로 가득 찬 방, 수박 같은 소소한 기억이 아니라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설렘으로 여름을 메워줄지도 모른다.

 나는 충동적으로 바쿠고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바쿠고!! 잘 부탁해!!” 하고 소리쳤다. 몇 번이나 복도에서, 운동장에서 마주친 얼굴인데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네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바쿠고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는 나를 째려봤다.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유쾌하게 느껴져서 나는 더 큰 소리로 바쿠고의 이름을 불렀다. 인내심이 바닥난 바쿠고가 깨끗한 폼으로 이쪽으로 달려와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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