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노
편차치 79를 뚫은 우등생이 히어로를 목표로 모인 유에이의 히어로과, 그 중에서도 1-A반. 많은 사건을 겪고 어린 나이에도 빌런과 몇 번이고 마주쳐 프로 못지않은 험한 경험을 치른 아이들이지만 그들 역시 사춘기 고등학생인 건 또래 학생과 다를 바 없었다. 날씨 하나에도 들뜨고 풀죽고, 계절의 작은 변화도 놓칠세라 화제로 삼아 하루종일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곤 한다. 그런 A반 학생들에게, 열대야를 동반한 여름이 찾아왔다. 여름하면 바다, 바다하면 수영복, 수영복의 여인과 로맨스야말로 목적이라며 주구장창 외치는 특정한 학생도 물론 없지는 않지만, 끊임없는 수업과 과제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숨통을 틔우는 건 그보다 소소하고도 간단한 판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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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
다들 식사를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 한가로이 쉬고 있는 점심시간이었다. 카미나리가 목소리를 낮게 깔며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할 일이 있는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 아이들은 따끈한 날씨와 나른한 오후가 일으키는 졸음을 견딜 무언가라도 있을까 소소한 기대를 안고 주위로 모여들었다. 키리시마도 그 중 하나였다. 바쿠고가 담임을 만나러 교무실에 간 사이의 시간을 때울 겸, 귀를 기울였다. 뭐 특별한 게 있겠냐는 밍밍하고 무심한 눈길을 애써 모른 척, 카미나리가 일부러 음침한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학교에, 무서운 소문이 있다는 거 알어? 무려 7대 괴담. 야오요로즈가 그런 게 있었나요?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에 대답하는 대신 카미나리는 말을 이어갔다.
“첫 번째, 밤이면... 교사용 화장실에, 긴 머리카락이 뚝.. 뚝.. 떨어져 있대!!”
재밌어하는지 무서워하는지 모를 비명이 작게 울렸다. 진위를 막론하고 이건 생각보다 흥미롭겠다, 그런 설렘을 안고 다들 눈을 반짝이며 의자를 끌어 카미나리 쪽으로 다가갔다. 괴담이라, 여름날의 한적하고 무더운 시간을 때우기엔 나쁘지 않은 주제였다. 아시도가 재빨리 일어나 커튼을 치고 세로가 불을 껐다. 그늘이 드리운 교실에서, 다들 손으로 부채를 저어 땀을 식혀가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건 미드나이트겠지. 숙직하거나 일이 있을 때 학교에서 머리감는 거 아닌가? 토도로키의 냉정한 지적에도 아이들은 김샌다는 반응보다는 아, 맞다, 그렇겠네, 하는 가벼운 대답으로 넘기고 카미나리를 재촉했다. 이미 분위기는 카미나리에게로 쏠려있었고 카미나리는 그에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스레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 뻐기는 순간도 찰나였다.
“두 번째, 교무실의 교장선생님 서랍의 비밀. 세 번째 칸은 열리지 않는대. 그 안에는 무시무시한...!”
“아, 나 그거 열어본 적 있어.”
우라라카가 손을 들고 멋쩍게 양심고백을 했다. 청소하다가, 물을 흘리는 바람에 닦느라 살짝 열었는데. 근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 비밀이었어?
“그냥 교장선생님 사진밖에 없던데. 셀카사진.”
뭐어? 나도 보고 싶은데! 하가쿠레가 보이지 않는 팔을 휘두르며 폴짝폴짝 몸을 들썩였다. 그에 이끌리듯 아이들은 와글와글 저마다 한 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교장선생님의 셀카가 대체 어떤 걸지 얼마나 귀여울지 소란스러운 와중, 넘어가는 화제에 끼어들고 싶은 걸 꾹 참고, 카미나리가 애써 분위기를 다시 돌려놓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흠, 그, 그거 말고도 있어. 음악실의 올마이트 사진 있잖아. 자정이면, 눈이 움직인대!”
하지만 이미 아이들의 흥미는 확실하지도 않은 괴담보다는 교장선생님의 사랑스러움으로 넘어간지 오래였다. 사진 어땠어? 언제 찍은 거 같아? 우리도 보여달라고 하면 보여주실까? 우라라카 주위에 모여들어 왁자지껄하니 사진에 대해 캐묻기 시작한 친구들의 머릿속에선 이미 카미나리에 대한 관심은 사라진 듯했다. 그 광경을 보며 세로가 위로라도 하듯 카미나리의 어깨에 손을 툭 올렸다. 아직 내 얘기 남았는데.. 부루퉁하니 뺨을 부풀리며 투덜거리던 카미나리의 앞을 키리시마가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눈을 번쩍이며 카미나리가 제 친우의 허리에 달려들었다. 친구야아! 내 얘기 들어줄거지?! 그 애타듯 외치는 말을 키리시마는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자정, 짝사랑하는 상대와 자신의 사진을 겹쳐 운동장의 네 번째 동상에 끼우면 좋은 일이 생긴대.
카미나리가 줄줄 늘어놓은 괴담 중 키리시마에게만 들려준 마지막은 약간 이색적이었다. 소문에 가까운, 맞으면 무섭고 아니면 말고, 식의 나머지 여섯 괴담과 달리 묘하게 방법은 구체적이면서도 결과는 두루뭉술했다. 좋은 일이 뭐냐고, 사랑이 이루어진다거나, 그런 게 아니냐는 키리시마의 질문에도 내가 아는 건 이게 다라며 카미나리가 고개를 저었다. 괴담이 아니라 미신과 주문에 가까운 내용이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키리시마는 뒤척였다.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말을 하며 카미나리가 의미심장하게 킥킥거린 게 떠올랐다. A반의 대다수가 알지 않을까 싶은 키리시마의 짝사랑을 의도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저에게만 이런 주문을 속살거렸을 리가.
“하아...”
몸을 다시 한 번 반대 방향으로 돌려 누우며, 손을 뻗어 머리맡에 둔 사진을 더듬어 쥐었다. 잡힌 건 바쿠고 카츠키와 자신이 같이 찍힌 사진이다. 결코 그런 미신에 휘둘리는 건 아니다. 이제껏 그래본 적도 없었다. 사나이답지 못하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게 사랑에 빠진 사람의 심정이기에 키리시마는 미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할까? 말까? 리스크는 거의 없는데다 만일 이루어진다면?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사진을 바라보며 한참을 홀로 묻고 답했다.
컴컴한 학교는 으스스할 정도로 조용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몰래 빠져나오고 만 키리시마는 주위를 둘러보며 긴장한 침을 꿀꺽 삼켰다. 경찰이나 교직원이라도 오면 큰일이기에, 조심조심 소리를 죽여가며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다행히 목적지는 건물 내부가 아니라 그나마 수월한 편이다. 조금씩 어둠에 익숙해지는 눈으로 더듬더듬 걸어가며 동상을 하나하나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낯선 히어로의 동상이 네 번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죄송해요, 조그맣게 실례를 사과하며 발돋움해 어깨와 목의 코스튬 사이에 자신과 바쿠고가 찍힌 사진을 겹쳐 접어서 끼웠다. 왠지 그냥은 발이 떨어지지 않아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사진이 바람에 떨어지지는 않을까 뒤를 힐끔거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도중부터는 거의 뜀박질에 가까운 발걸음이었다.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된다는 생각에, 괜히 찔리는 기분에, 아무도 없는 길을 헉헉거리며 뛰었다. 제 방에 들어와 침대에 뛰어들었을 때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세게 뛰었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진짜 해버리다니, 싶은 후회와 어쩌면, 하는 기대감을 품고 그대로 정신을 잃듯이 잠이 들었다.
꿈을 꿨다. 새하얀 공간에 바쿠고가 눈앞에 있었다. 같은 교복에 같은 나이, 똑같은 바쿠고인데도 어딘가 분위기가 달랐다. 바쿠고. 너 정말 바쿠고야? 얼빠진 목소리로 묻는 자신에게 바쿠고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살풋 웃었다. 키리시마, 나긋한 바쿠고의 목소리가 마치 바로 옆에서 귓가를 울리는 것 같았다. 키리시마, 난 널. 예전부터. 퍼뜩 눈을 뜨고 일어났다. 기묘한 꿈이었다. 현실 같기도 하고, 절대 현실이 아닌 듯한 꿈. 꿈의 여운에 헤어나지 못해 멍한 정신으로 등교 준비를 하고 방문을 열었다. 마침 옆방에서 문이 열리며 복도로 나오는 바쿠고와 딱 마주쳤다. 바쿠고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좋, 좋은 아침. 바쿠고.“
바쿠고가 조용히 웃었다. 비웃는 것도, 의기양양하게 자신감을 내보이는 것도 아닌 정적인 미소.
“좋은 아침, 키리시마.”
순간 누군가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그 표정과 어투에 심장이 콱 조이는 것만 같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얼굴이 얼마나 달아올랐을지는 후끈하게 등골을 타고 오르는 더운 기운으로 알 수 있었다. 바쿠고가 어서 가자고 키리시마를 재촉하며 등을 돌렸다. 그 말투는 아까와 달리 키리시마가 알고 있는 평소의 바쿠고였다. 앞선 바쿠고의 뒷모습을 보며, 설마, 주문이 영향을 끼친 걸까, 그런 생각을 했다. 설렘과 동시에 묘한 불안이 들었다.
키리시마가 순간순간 느끼는 바쿠고의 변화는 아침의 인사만이 아니었다. 바쿠고가 다정했다. 노골적으로 태도가 바뀐 건 아니다. 다만 다들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키리시마에게만 대하는 태도, 말, 반응이 평소와 다를 때가 있었다. 게다가 둘만 가까이 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밥 먹으러 가자며 항상 그랬듯 제게 뛰어오는 키리시마에게 한걸음 더 다가와주는 게, 수업시간에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살짝 웃어주는 게 수많은 예시 중 일부였다. 바쿠고의 갑작스런 변화에 마음이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 위화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위화감에 키리시마가 살짝 어깨를 떨 때마다 바쿠고는 더욱 다정한 눈빛으로 키리시마를 쓰다듬듯 바라보곤 했다. 왜인지 고양이 앞의 쥐가 된 기분을 느끼며 키리시마는 그 눈을 피하곤 했다.
위화감이 있든 없든 일상은 평범하게 흘러갔다. 평소보다 훨씬 피곤한 기분으로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와 씻을 때조차 바쿠고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다만 예전과 달리 기쁨과 애정으로 들뜨는 기분이 아닌, 불안과 위화감으로 가득한 조마조마한 감정이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실수한 건 아닐까. 몇 번이고 그 생각을 털어버리려고 젖은 머리를 저었다. 하필이면 그날은 같이 숙제하기로 한 밤이었다. 어떻게 거절할 수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결국 키리시마는 바쿠고의 방문을 두드렸다. 언제나 그랬듯 바쿠고와 나란히 앉아 교과서와 공책을 펼쳐놓고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몰두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유난히 긴장되는 건 어쩐지 자꾸 바쿠고의 시선이 느껴지는 탓이다. 따끔따끔하게 제 뺨을 쓸어내리는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공책에 의미 없이 낙서에 가까운 필기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키리시마에게로 손이 뻗어왔다. 바쿠고..? 고개를 돌려 불안하게 바쿠고를 쳐다봤다. 바쿠고의 생각을 전혀 알 수 없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씻은 후라 낮과 달리 차분히 내려온 붉은 머리카락을 바쿠고가 살짝 쓰다듬었다. 손가락으로 감고, 내리훑었다. 온화한 눈으로, 바쿠고가 키리시마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줄곧 만져보고 싶었어, 키리시마의 머리카락.”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어딘가 평소와 다르다고는 해도, 낯설게 느껴진다고 해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바쿠고가 몸을 밀착해왔다. 비누냄새 사이 달큰한 향이 느껴졌다. 바쿠고의 살내음. 바쿠고가 점점 다가왔다. 어깨와 팔의 온기가 느껴진다. 따뜻한 숨결이 닿아왔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겹쳐지려는 순간.
“나, 나 오늘은 가볼게! 고마워! 잘 자.”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챙겨들고 황급히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닫는 게 고작이었다. 다리에서 힘이 쫙 풀려 그대로 벽에 기대 주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숨을 몰아쉬며, 잘한 짓일까, 아니면 가만있었어야 했을까, 한참을 어두운 복도에서 고민했다.
잠까지 설치고 말았다. 기초학 수업을 받기엔 최악의 컨디션이다. 피곤한 몸으로 겨우 제 차례를 마친 키리시마는 친구들이 훈련하는 걸 연신 하품하며 지켜봤다. 어느덧 바쿠고의 차례였다. 화려하게 허공을 가르며 폭파를 일으키는 바쿠고는 키리시마가 잘 아는 바쿠고 자체였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키리시마는 겨우 찜찜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웃어보였다. 바쿠고는 어떻든 바쿠고라고, 겨우 안심하려고 했다.
제자리로 돌아온 바쿠고에게 키리시마가 달려갔다. 바쿠고, 역시 대단하다. 굉장해. 그렇게 감탄하며 찬사를 쏟아냈다. 바쿠고에게도 키리시마에게도 익숙한 대화패턴이다. 하지만 그에 돌아온 대답은 키리시마를 얼어붙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
생긋 웃으며 바쿠고가 그렇게 말했다. 분명 언젠가, 비슷한 말을 바쿠고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달랐다. 바쿠고가 아니다. 바쿠고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보며 말하지 않는다. 잠시 느끼던 안도감이 무너져 내렸다. 굳어버린 키리시마의 반응에 바쿠고가 갸웃하며 다가왔다. 흠칫 뒷걸음질을 쳤다.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넌 누구야. 바쿠고는 어딨어.”
바쿠고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키리시마가 물러날 때마다 한 걸음, 한 걸음 거리를 좁혔다. 벽에 부딪힌 키리시마가 발을 멈추자 그 귓가에 대고 바쿠고가 아닌 바쿠고가 속삭였다.
“네가 바란 카츠키잖아. 난 널 사랑해줄 수 있어. 얼마든지.”
키리시마, 좋아해.
간절히 바라던 말이었다. 꿈에서조차 애달파하던 한마디였다. 바쿠고의 모습으로, 바쿠고의 목소리로 제게 너무도 달콤한 말을 속삭여왔다. 이대로 붙잡는다면, 바쿠고는 날 사랑해줄까? 내 것이 되어줄까? 그런 생각이 아주 잠시 스쳤지만, 키리시마는 고개를 저었다.
“넌 바쿠고가 아니야.”
그 말에 서늘하게 표정을 잃는 바쿠고를 내버려두고 키리시마는 자리를 떴다.
두 번째로 숨어든 밤의 교정은 처음보다는 긴장되지 않았다.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있기에 머뭇거릴 것도 없었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느꼈다. 제가 주문이랍시고 행한 짓을 돌이켜야만 했다. 발소리를 죽여 동상 앞까지 서둘렀다. 하나, 둘, 셋, 넷. 네 번째 동상 뒤에 꽂아둔 사진. 발돋움해 손을 뻗었지만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당황한 나머지 밑에 떨어졌을까 살피는 키리시마의 귀에 바스락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바쿠고였다. 찾고 있던 사진을 한 손에 든 채, 동상 뒤에서 걸어 나왔다. 바쿠고의 얼굴로, 본 적도 없는 표정으로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거 찾아?”
“바쿠..”
이름을 부르려던 입을 다물었다. 바쿠고가 아니란 건 이미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긴장해서 딱딱해진 어투로, 사진 돌려줘,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바쿠고는 그에는 대답없이 가볍게 몸을 놀려 동상 위로 올라섰다. 내려다보는 시선과, 올려다보는 필사적인 눈이 마주쳤다.
“이미 늦었어.”
바쿠고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고, 그리 말하며 천천히 사진의 귀퉁이를 양손으로 쥐었다. 구깃구깃해진 오래된 사진은 가볍게 가하는 힘에도 금방 찢어질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키리시마와 바쿠고의 사이가 찌직, 가느다란 소리를 내며 갈라지려는 때였다. 사진이 찢어지면 다시는 바쿠고가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 그건 확신이었다.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개성을 끌어올려 몸을 경화시켰다. 피부가 단단히 굳는 감각을 느끼자마자, 그대로 동상에 있는 힘껏 몸을 날렸다.
부딪힌 부분에서부터 쩌억 갈라지며 동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조각조각난 돌덩이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자잘한 돌조각이 튕겼다. 그와 함께 깨진 동상의 안에서 마치 폭발하듯 수많은 사진이 솟구쳐 허공에 나풀나풀 흩날렸다. 낡은 사진이, 지금까지 수없는 사람이 애타게 담아왔을 안타까운 마음이 그렇게 갇혀있다 이제야 터져나왔다. 그에 아랑곳할 겨를도 없이 키리시마는 부서진 동상 위로 몸을 날렸다. 발판이 무너져 균형을 잡지 못해 떨어지는 바쿠고를 향해 팔을 힘껏 뻗었다. 바쿠고! 간절히 외치며, 그대로 품속으로 떨어지는 묵직한 무게를 두 팔로 안아서 받아냈다. 휘청하며 한쪽 무릎을 땅에 짚으면서도, 키리시마는 끝끝내 바쿠고를 놓지 않았다.
다시금 캄캄한 교정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흙먼지조차 뽀얗게 가라앉고, 사방이 조용해졌다. 키리시마의 팔 안에 안긴 채 바쿠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구한 거야? 네 바쿠고가 아니잖아.”
“바쿠고니까.”
즉답이었다. 그 말에 바쿠고는 눈을 크게 떴다. 눈썹을 힘없이 내리고는, 아직 경화를 채 풀지 않은 키리시마의 단단한 팔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마음을 빼앗겨 버리든지, 혐오하고 피하든지. 둘 중 하나일 텐데.”
넌 다르구나, 레드라이엇. 키리시마 에이지로. 네 그런 면이 좋았어. 키리시마는 뭐라고 해야 할지 그저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바쿠고가 아닌 바쿠고, 하지만 역시 바쿠고였다. 어떻다고 해도, 지키는 히어로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자신으로서는 바쿠고를 위험에 처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런 키리시마의 심정을 꿰뚫어라도 본 듯, 바쿠고가 살짝 웃었다. 위화감이 드는 그 여유로운 미소는 더 이상 아니었다.
“돌려줄게, 네 바쿠고.”
그러며 서서히 눈을 감는다. 빨간 눈동자가 다 가려지기 직전, 아참, 하고 바쿠고가 입꼬리를 올리며 속삭였다. 좋은 걸 알려줄게. 난 허상일 뿐이지만, 내 모든 게 거짓은 아니었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바쿠고가 고개를 떨구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든 듯, 정신을 잃은 듯, 반응이 없는 바쿠고에 조금 무서워진 키리시마가 바쿠고를 살짝 흔들었다.
“바쿠고..?”
불안한 목소리로 눈을 감은 채 꼼짝도 않는 바쿠고를 재차 불렀다. 저를 부르는 소리에, 미간부터 살짝 찌푸리며 바쿠고가 눈을 떴다.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었다.
“뭐야, 여긴. 씨바알...”
그 욕지거리가 이렇게나 반가운 적은 또 없었을 것이다. 눈물이 고일 만큼 벅차오르는 기분에 키리시마는 바쿠고를 안은 팔에 힘을 꼭 줬다. 그제야 제 자세를 깨달았는지 바쿠고가 움찔 어깨를 떨고는 키리시마를 올려다봤다. 키리시마?
“응. 바쿠고, 고마워.”
돌아와줘서, 고마워. 떨리는 목소리로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런 키리시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바쿠고의 얼굴이 점점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붉게 물들어갔다. 키..리시마. 이거 놔. 자신을 꼭 안은 키리시마의 팔을 힘없이 밀며 바쿠고가 그리 말했다. 하지만 키리시마는 그 말보다도 새빨간 바쿠고의 얼굴에 놀라, 바쿠고를 안느라 꼼짝할 수 없는 두 팔을 놓는 대신 고개를 숙여 바쿠고의 이마에 제 이마를 살짝 닿게 했다.
“바쿠고, 열은 안 나는데... 어디 아파?”
“....저리 가.”
“어?”
“떨어지라고!!”
캄캄한 교정에 거대한 폭파음과 불꽃이 일어났다.
바쿠고를 지키기 위해서라고는 하나 엄연한 학교의 재산인 동상을 산산조각낸 대가는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날 학교에 가도 선생님은 물론, 학생들조차 소동에 대해 언급하는 기색이 없었다. 의아한 나머지 동상이 있는 곳을 찾아갔지만 그곳에는 낯선 히어로가 아닌, 키리시마도 잘 아는 유명한 히어로의 동상이 마치 처음부터 제 자리였다는 듯 서 있을 뿐이었다. 어리둥절해 지나가는 B반 학생을 잡고 물어도 키리시마가 사진을 꽂은 동상은 그 누구도 모른다고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주무운? 그런 소릴 내가 했었어?”
카미나리가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치만, 분명히 그날 나한테만 해준 얘기가 있었잖아. 그러는 키리시마의 말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카미나리가 아하, 고개를 끄덕였다.
“7대 괴담 마지막 얘기 말이지? 근데 그거 분명.”
예지몽을 꾸는 방법이었는데.
그 말에 키리시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