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
“…아오, 머리야.”
머리는 지끈거리고 눈앞은 핑핑 돌았다. 시발, 좆같아. 정말로 지겹다 못해 혐오스러울 정도의 감기였다. 바쿠고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이번 여름에는 드디어 걸리지 않고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문제였다. 결국에는 또 감기에 걸려버렸으니까 작년과 크게 달라진 것 하나 없었다.
정말로 이상한 체질. 바쿠고도, 그의 부모님도, 친구도, 지인도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었다. 날씨가 상당히 쌀쌀한 봄과 가을, 그리고 얼음장과 같이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에는 가벼운 감기조차도 걸리지 않는다. 이런 모습만 보면 정말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지. 하지만 바쿠고는 달랐다.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햇볕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릴 듯이 무더운 여름날, 가볍게는 코를 훌쩍이는 정도로 끝나는 것부터 심할 때는 폐렴으로 입원하기까지. 정말이지 전생부터 지독한 악연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고 매년 바쿠고는 생각했다.
위이잉, 위이잉.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시발, 지금이 몇 시인데 전화하고 지랄이야. 중요한 일 아니기만 해봐. 바쿠고는 미간을 평소보다 더 미간을 팍 찌푸리며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눈앞이 흐릿해서 몇 번이나 휘청거리는 몸이 마음에 안 들었다. 조금만 힘을 풀면 무너질 것만 같은 다리로 돌덩어리도 아닌데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지탱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진동이 울리는 곳을 찾았다. 저 멀리 침대와는 정 반대쪽에 위치한 책상 위에서 바쿠고가 전화를 빨리 받았으면 좋겠다는 듯 이리저리 움직이며 진동하는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 시발, 존나 멀리 있잖아. 한숨을 푹 내쉬고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한 발짝, 두 발짝, 그리고 세 발짝. 진득하게 걸음을 옮긴 결과 전화벨이 끊기기 전에 핸드폰이 있는 책상에 도착했다. 핸드폰에 손을 뻗는 순간 몰려오는 어지러움에 뻗었던 손은 급하게 책상으로 향했다. 잠시 눈을 감고 어지러움이 진정될 때까지 숨을 골랐다. 곧 가라앉은 두통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전히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잡아 전화를 받았다. 평소와 같았으면 화면에 뜨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받았겠지만 바쿠고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고 심지어 눈앞이 흐릿해서 확인을 했다고 하더라도 보이지 않았으리라.
“시발, 왜 아침부터 전화하고 지랄이야. 대가리가 없냐? 생각이 없어? 이 시간부터 전화질하는 건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었냐고.”
전화를 받자마자 바쿠고의 입에서는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욕이 쏟아졌다. 주요 내용은 왜 이 시간부터 전화하고 지랄이냐는 내용이었다. 상대방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짜증을 냈다. 저…, 바쿠ㄱ, 당연히 상대방이 바쿠고의 이름을 부르려고 해도 무시당할 수밖에. 얼마 지나지 않아 목이 칼칼해지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목 안쪽이 따갑고 무언가 걸린 것처럼 갑갑했다. 말이라는 무기로 찔러버릴 것처럼 쏟아지던 말이 끊기고 중간 중간 기침소리가 들리자 전화 너머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바쿠고의 이름을 불러왔다.
- 바, 바쿠고?
“컥, 쿨럭, 시이, 발.”
- 바쿠고, 감기야?
“아, 뭐야, 병신머리였, 컥, 으, 목 아파.”
- 바쿠고, 너 괜찮아? 목소리가 반쯤 나갔잖아? 약은? 따뜻한 물 마셔하는 거 아니야? 아니, 감기 심한 것 같은데….
“야, 머리 울리니, 까 쫑알거리지 마.”
- 바쿠고, 바쿠고. 나 너희 집으로 갈까? 너 혼자 있는 거 아니야, 지금?
“헛소리, 짓거리, 지 말고…, 절대 오지 마. 끊는다.”
전화 너머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가 왜 우리 집에 와. 애인도 아니고…. 실소를 흘리며 핸드폰을 꺼버린 후 다시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또 연락 오면 귀찮으니까. 복잡해진 머리와 함께 목도 다시 아파오는 것만 같았다. 따끔따끔한 목 속으로 시원한 물을 흘려 넣으면 조금은 나아질 것 같기도 했지만 물을 마시러 나가기에는 자신의 몸이 계단을 내려가서 거실을 거쳐 부엌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결국 물을 마시는 것은 포기하고 다시 잠이나 청해야겠다고 생각한 바쿠고는 침대 쪽으로 몸을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몸과 머리는 따로 논다고 했다고 누가 말하지 않았나? 바쿠고의 의사와는 다르게 부들거리는 다리는 바닥에서 발을 때는 순간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다리가 풀려 넘어지면서 지면에 머리를 부딪쳐 밀려오는 고통과 어지러움에 바쿠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무턱대고 전화를 끊은 바쿠고에 키리시마는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아픈 애 붙잡고 아침부터 전화한 일이 잘못되었다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러고 보니 바쿠고 상태 좋아 보이지는 않던데. 아침도 약도 아직 안 먹었을 것 같고. 키리시마는 혼자 끙끙 앓고 있을 바쿠고를 상상―이 가지 않았지만―하다가 자신이 죽과 약을 사들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바쿠고는 오지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바쿠고네 집은 현재 위치에서 대략 이십분 정도 걸리고 가는 길에 그 길목에 죽 가게가 하나 있었다. 아마 전화번호가 남아 있을 텐데…, 아 여기 있다. 키리시마는 전화번호를 꾹 눌러 죽을 미리 주문해놓고 약국으로 향해 감기약을 샀다. 빨리 가야지. 키리시마는 부지런히 바쿠고네 집으로 발을 옮겼다. 물론 가는 도중에 주문했던 포장한 죽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쿠고네 집 앞에 도착한 키리시마는 현재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방황 중이었다. 패기 좋게 온 것은 좋았으나 자신은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초인종을 여러 번 눌렀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고 바쿠고에게 전화했지만 전원이 꺼진 상태라는 안내 음성만 귓속으로 흘러들어올 뿐이었다. 무슨 방법은 없는 걸까. 키리시마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그리고 머리를 굴리고 굴려서 나온 방법은 미도리야에게 연락하는 것이었다. 둘이 사이가 아무리 안 좋다고 하더라도 소꿉친구라는 사실에는 전혀 변함이 없으니까.
침을 꼴깍 한 번 삼키고 미도리야에게 전화를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어지던 신호음이 끊어지고 전화 너머로 미도리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키리시마군? 연락이 되었다는 안도감도 잠시, 키리시마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어쨌든 남의 집 개인 정보니까.
“에, 미도리야. 바쿠고 집 비밀번호 알고 있어?”
“음, 캇쨩 비밀번호? 그건 왜?”
“바쿠고 감기라서 죽이랑 약이랑 이것저것 사들고 왔는데 전화도 안 받고 초인종 눌러도 대답이 없어서 말이야.”
“에, 확실히 오늘 캇쨩네 부모님 외출하시는 날이고. 아아, 정말 캇쨩도 이럴 때는 바보 같다니까. 키리시마군, 집 비밀번호는 캇쨩 생일이야. 0420. 알고 있지?”
“응. 고마워, 미도리야!”
미도리야와의 전화로 집 비밀번호를 알아낸 키리시마는 비장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무단침입이라는 점이 상당히 마음에 걸렸지만 전화 너머로 추측해낸 바쿠고의 상태는 그러한 마음을 지워버리고도 남았다. 띠리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키리시마는 천천히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고 곧장 바쿠고의 방이 위치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천천히 미끄러지지 않게 계단을 오르고 나면 바로 보이는 바쿠고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가볍게 노크하며 바쿠고를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방마저 주인의 허락 없이 들어가야 할 상황에 키리시마는 이미 반쯤 허탈한 상태였다. 들어갈게, 바쿠고. 키리시마는 문고리를 돌렸다. 철컥, 소리가 울리면서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 안쪽으로 보이는 건 방바닥에 쓰러져있는 바쿠고였다.
“…바쿠고!”
손에 쥐고 있었던 죽과 약도 바닥으로 내팽개치고 곧장 바쿠고에게로 향했다. 바쿠고의 몸은 뜨거웠다. 열이 심하게 올라 정신을 잃고 있음에도 숨을 쉬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침대에 눕혀야한다는 생각에 목 뒤와 다리에 팔을 조심스럽게 끼워 넣어 천천히 들어올렸다. 비슷한 체구를 들어 올리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끙끙 거리며 바쿠고를 거의 던지다시피 침대에 올렸다. 몸에 지금 열이 많아서 열을 내보내야할 것 같은데 지금은 여름이라 그러기도 힘들다는 게 문제였다.
몸을 물수건으로 꾸준히 닦아주면 조금 나아진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게 기억난 키리시마는 화장실로 가서 차가운 물을 떠와 수건을 적셨다. 물을 떠온 후 수건을 적신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뒤가 문제였다. 옷을 벗겨야 하는데 집에 마음대로 침입해서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고 거기다 이제는 옷까지 벗겨야 한다니. 스멀스멀 죄책감이 온 몸을 타고 올라와 목을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하아, 진짜 미안해 바쿠고. 키리시마는 두 눈을 딱 감고 천천히 바쿠고의 잠옷 단추를 풀어 내려갔다. 으으, 이윽고 단추를 다 끄르고 차가운 물에 잔뜩 젖은 수건을 꾹 짜서 천천히 바쿠고의 몸을 닦아나갔다. 물이 미적지근해지면 갈아오는 행동을 몇 번 반복했을까, 다행히 바쿠고의 열이 한층 가라앉았고 아까 전에 풀어놓은 단추를 다시 잠갔다. 그제야 한숨을 돌린 키리시마였다. 젖은 잠옷을 갈아입혀줘야 하는 건 아닌지 갈등했는데 옷까지 갈아입혀 주었다가는 바쿠고가 일어났을 때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깔끔하게 접어버렸다.
이제 바쿠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언제 깨어날지 알 수가 없으니 고민이었다. 죽을 다시 끓여야할 것 같은데 끓이러 간 사이에 깨어나는 것도 곤란하니까. 그래도 빨리 데워놓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판단한 키리시마는 죽을 데우러 내려갔다. 시간이 흐른 후, 죽을 담은 그릇을 가지고 올라온 키리시마는 조금 전 바쿠고가 깨어났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은 괜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죽을 데우러 갔다가 오는 시간이 상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바쿠고는 미동도 없이 여전히 잠에 빠져있었다.
가져온 죽을 옆에 내려놓고 바쿠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풀려있는 미간은 바쿠고를 유한 인상으로 보이게 했다. 이렇게 보니 알고 있기는 했지만 정말 잘생긴 얼굴이었다. 입만 험하지 않았다면 아마 매일 매일 고백을 받는 일이 일상이었을지도. 키리시마는 킥킥 웃으면서도 마음 한 곳이 이상하게 바늘로 찔리는 것처럼 아파왔다. 또 이러네.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바쿠고를 다시 바라봤다. 빨리 일어나면 좋겠는데. 땀에 젖어 이마에 늘러 붙어버린 바쿠고의 앞머리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키리시마의 바램이 닿은 건지, 아니면 키리시마의 손길을 느낀 탓인지 바쿠고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얌전히 감겨있던 바쿠고의 눈이 떠졌다. 초점이 안 맞는 탓인지 바쿠고는 몇 번이나 더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제대로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분명 아까 침대에 가려고 했었는데 어째서 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건지 안 봐도 뻔했다. 나는 쓰러졌고 그 모습을 옆에 지금 있는 병신머리가 발견하고 옮겼다는 사실이. 그렇지 않고서는 해가 저 위에 떠 있는 것, 그리고 키리시마가 지금 내 옆에 있을 리가 없으니까.
바쿠고는 키리시마에게 분명히 오지 말라고 의사전달을 했다.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 말도 무시하고 기어코 집에 찾아온 키리시마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기다가 문을 열어준 기억도 없는데 멀쩡히 집에, 그것도 자신의 방에 들어와 있는 모양새가 꽤나 모순적이다. 부모님 연락처도 모르는 놈인…, 아 망할 데쿠새끼가 집 비밀번호를 알려준 것이 틀림없었다. 도움이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좆같은 새끼.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이참에 비밀번호를 바꿔야겠다고 바쿠고는 굳게 마음을 먹었다.
“야, 너. 내가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바쿠고 나 안 왔으면 부모님 오실 때까지 쓰러져 있었을 거라고?”
“윽.”
정곡을 찔린 바쿠고는 더 이상 반박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반박해봤자 돌아오는 말을 아마 자신이 이길 가능성은 없다는 판단 아래였다. 바쿠고가 입을 닫자, 키리시마는 킥킥 웃다가 옆에 놓여 있는 죽 접시를 들었다. 데워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숟가락으로 죽의 윗부분을 떠서 후, 불어 식힌 후 흘리지 않게 밑 부분을 손으로 받쳐 바쿠고의 입 앞쪽으로 가져다 대었다. 바쿠고 아, 해!
아기도 아니고. 멀쩡한 손도 있는데 내가 저 죽을 받아먹어야 할 이유가 있나? 바쿠고는 짜증이 확 솟구쳤다. 뭐하는 짓이야. 나도 손 있어. 멀쩡하니까 숟가락 이리 내놔. 고개를 돌려 입술에 닿을락 말락한 숟가락을 피하고 키리시마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숟가락 들 힘도 지금은 없을 것 같은데…, 바쿠고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바쿠고의 안면에 대고 내뱉었다가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분명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가 키리시마는 살기 위해 얌전히 목구멍으로 말을 넘겼다. 그리고 조심해서 먹으라는 말과 함께 순순히 죽 그릇과 숟가락을 바쿠고의 손에 넘겼다.
그릇 가득 차있던 죽은 어느새 바닥을 보였다. 군데군데 묻은 쌀알을 숟가락으로 싹싹 긁어모아 입 안에 넣는 것으로 바쿠고는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릇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키리시마는 물 컵과 약을 건네주며 먹으라며 눈을 반짝이며 바쿠고를 바라보는 키리시마의 모습에 인상을 쓰다가 결국 체념하고 건네받은 물을 머금은 후 알약을 넣어 꿀꺽 삼켰다. 쓴맛이 입에 감도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으, 써. 꿍얼거리면서도 약을 받아먹는 바쿠고의 모습을 보며 키리시마는 바쿠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생각으로 쓰다듬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어쩐지 저절로 손이 향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바쿠고, 약도 잘 먹네!
괜히 얼굴이 화끈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상한 기분에 바쿠고는 키리시마의 손아귀에서 머리를 피하며 오히려 키리시마의 이마를 가볍게 쳐냈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이마를 문질거리는 키리시마에게 바쿠고는 네가 사온 죽도 먹고 약도 먹었으니까 어서 꺼지라며 팔을 휘적휘적 거렸다. 그래도 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다가 어느새 침대 위로 올라와 앉아있는 키리시마를 내쫓았다. 아니 내쫓으려고 했었다. 의도와는 다르게 키리시마에게 밀쳐져 다시 침대에 눕게 되지만 않았더라면.
바쿠고는 키리시마를 방바닥으로 떨어트릴 생각이었다. 그 후 방 밖으로 내보내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런데 그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키리시마가 바쿠고를 눕히고 그 위에 팔을 걸치면서 침대에 가둬놓은 모양새가 되었으니까. 키리시마를 밀어내려 애썼지만 앓는 것에 기운을 다 써버린 바쿠고가 건강한 키리시마를 밀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야, 비, 켜.”
“왜? 이대로 그냥 있자, 바쿠고. 너 몸도 안 좋고. 너만 두고 갔다가 또 쓰러지면 어떡해?”
바쿠고는 키리시마가 이상한 논리를 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센티 되지 않는 거리에서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괜히 심장이 천둥번개가 치듯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이러다가 진짜 머리가 이상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나자 바쿠고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키리시마를 자신의 방에서, 아니 집에서 내보내야한다는 결론을 재빠르게 내렸다.
어떻게 해야 병신머리을 내보낼 수 있지?
그 어떤 말을 해도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나갈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 하나만을 믿고 머리를 굴렸다. 욕을 해도 들어먹지 않아. 애원을 해도 아마 안 된다. 그냥 부탁을 해도 들어주지 않겠지. 후, 그냥 직구가 가장 나을 것이다. 돌려서 말해봤자 알아듣지 못할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야, 너 가. 침대에 누워 있지 말고 꺼져.”
“….”
“너 가 봐도 된다니까?”
“….”
“어이, 키리시…,”
“저기 바쿠고. 얼굴 아까보다 빨개졌는데 혹시 바쿠고 너 다시 열나는 거 아니야?”
바쿠고는 자신의 상태는 나쁘지 않다고 수차례 말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알았다는 긍정의 말이 아닌 아예 다른 주제의 말. 얼굴이 붉다는 소리였다. 얼굴 완전 붉은데 진짜로 너 열나는 거 아닐까, 키리시마는 중얼거리며 손을 자신의 이마에 대었다가 그 손을 바쿠고의 이마에 갖다 대며 온도를 비교했다. 역시 열이 아직 덜 내린 것 같은데. 미지근한 것 같기도 하고. 열도 얼마 안 나는데 왜 이렇게 얼굴이 잘 익은 사과 같지.
한편, 바쿠고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심장은 100미터를 전력으로 질주한 것 마냥 무자비하게 뛰었다. 정상적인 심장 박동수로 돌아가기는커녕 더 빠르게 뛰었다. 이게 뭐야, 진짜. 바쿠고는 자신의 이마에 붙어있는 키리시마의 손을 떼어내며 자신이 열이 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손이 차가운 것이라며 손사래 쳤다. 시발, 나 괜찮다고. 열나는 것도 아니다 새끼야. 그러니까 빨리 꺼져.
키리시마는 바쿠고의 말을 그저 듣고만 있었다. 내가 바쿠고한테 뭐라고 했나? 자신이 뭐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뭐에 찔려서 변명하고 있는 건지 바쿠고의 얼굴은 본인은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역시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은 폭탄과 같았다. 진짜 아픈 거 맞는 것 같은데.
바쿠고는 어떻게 해서든 키리시마를 집에서 내보낼 보낼 생각뿐이었다. 야,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기는 한 거냐? 빨리 꺼지라니까? 키리시마를 밀어내며 계속 짜증내던 바쿠고는 키리시마가 툭 던진 말에 밀어내던 것도 멈추고 벙 찔 수밖에 없었다.
“누가 그랬는데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바쿠고 너 지금 강하게 부정하고 있잖아-. 누가 들으면 나 아프니까 같이 좀 있어주세요, 하는 것으로 알아들을지도 모른다고?”
시발 그게 무슨 헛소리, 말문이 턱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바쿠고를 보고 키리시마는 말을 이었다.
“봐봐, 아까도 얼굴 붉었는데 더 붉어졌어, 바쿠고! 역시 같이 있어줄게!”
그렇게 키리시마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한 채 바쿠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포기하고 잠을 청하는 바쿠고의 모습을 키리시마는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바쿠고.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으며 바쿠고가 자는 모습을 구경하던 키리시마는 나른한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 둘은 바쿠고의 부모님이 퇴근하고 돌아오실 때까치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는 것은 우리들만 미리 알고 있는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