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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바쿠] Warming-pool(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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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유달리 멀미에 취약했다. 정신없이 눈 앞이 흔들리는 것, 배경이 뭉쳐보일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 몸을 답답히 죄이는 것 등 모든 사나운 조건들을 포괄하여 속이 문드러진다는 쪽에 가깝다. 놀이공원? 회전목마나 겨우  탈 수 있을 수준이고 4D 영화관? 차마 꿈도 꿀 수 없었다. 내가 짐승이라면, 그런 곳들은 도살장이나 마찬가지리라. 때문에 제한된 취미생활이 많았다. 가장 좋아하는 건 조용한 집 안에서 가만히 누워 있는 거였다. 십자수를 해도 바늘이 움직일 때마다 어지러웠고, 책은 오래 읽으면 인쇄된 글자가 날아다녔다. 유별난 애라는 소리를 가장 많이 들었다. 귀찮을 만큼 예민하다고 손가락질 한들 내가 힘들다는데 저깟 것들이 어쩔 건가 싶었다. 상대의 고충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트라우마와 가깝도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을 경시하는 건 그릇된 사회화의 전조 아닌가. 시야가 핑핑 돌고 윗배가 묵직하게 울렁거리며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상태를 달가워할 인간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더 심하면 더러운 변기를 붙잡고 짙은 키스를 나눠야 했다. 첫키스가 변기 커버라니. 최악 중의 최악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시외버스 안에 갇혀 있는 중이다. 혹시나의 사태를 대비해 멀미 방지 스티커를 귀 밑에 붙이고, 언제든 꺼낼 수 있도록 검은 비닐봉지를 좌석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최대한 바닥을 보지 않도록 휴대폰은 무음인 상태로 가방 안에. 고개를 처들고 창문만 오매불망 바라보고 있다. 동승한 친구들은 조잘조잘 가벼운 목소리로 떠들어댄다. 어제 본 가요 프로그램의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그 아이돌 그룹의 리더가 부주연인 막장 미니드라마에 대한 이야기가 주였다. 그 애는 연기 별로더라. 소리 지르는 것밖에 못하잖아, 라는 혹평으로 시작해도 구태여 호불호를 따지자면 언제나 호였다. 잘생겼으니까. 얼굴이 잘생겼으니 연기를 그따위로 해도 먹혀들어가는 게 분명했다. 사실 나는 화제의 아이돌 리더에겐 정말 조금의 관심도 없는 머글 중 하나로 그 애가 연기를 못하든, 때문에 한창 인터넷을 달구는 토론의 중심이든 상관할 바가 안 됐다. 여초 카페에서의 뜨거운 감자보다 당장 격한 춤사위를 자랑하는 내 위장을 신경 쓰기에 더 바빴다. 

 

“차라리 연기할 시간에 춤연습이나 한 번 더 하라니. 열심히 하고 있는 K에게 말이 심하잖아! A는 어떻게 생각해?”
 

 

친구들은 파리한 내 안색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마냥 네게 시선을 옮긴다. 의자 등받이를 최대한 뒤로 젖힌 상태던 나는(천운으로 내 뒷자리는 공석이었다.) 감았던 눈을 게슴츠레 떴다. 몰라. 모른다고! 그딴 유치한 드라마 보지도 않고, 걔네 노래 인기차트 무작위 재생 목록에서 들어본 게 다야! 그것보다 나한테 말 걸지 마. 토할 것 같으니까! ……라고 말하면 내일 당장 휴학 해야겠지.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마 잠에 녹녹히 젖은 얼굴일 테다.
 

 

“K는 연기 처음이니까 서툴 수밖에 없지.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아, 이 천재적인 답변. 친구들은 만족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라며 내 의견에 동의하곤 이내 저들끼리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뜬 눈으로 창문을 바라보니 바깥 풍경이 새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언제쯤 도착하나. 휴대폰을 확인할 수 없으니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조차 모호했다. 내가 아는 건 시외버스로 두 시간 내외를 달리면 우리의 목적지가 나온다는 것 뿐이다. 목적지. 지금 미친듯한 멀미에 시달려가면서도 친구들의 손에 뒷덜미를 잡혀 향하고 있는 목적지는 다름 아닌 「워터파크」다. 작년 완공된 신설로, 친구 중 하나가 반값 할인 쿠폰을 세 장이나 얻은 게 원흉이었다. 심지어 동반 1인까지 해당되는 쿠폰으로, 그 워터파크 브랜드 회사 관계자인 제 삼촌의 친구의 사촌이(이미 이 정도면 남이 아닐까.) 여름방학인 겸 놀러오라며 우편을 통해 보내준 것이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워터파크 여행은 충분한 서사를 이룰 수 있었으나 사실 친구들을 흥분케 한 이유는 다른 쪽이었다.
 


 

“진짜 이만큼 닮았을까?”


 

인터넷에 뜬 사진을 확대하던 친구가 흘리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휴대폰 화면을 공유하던 또 다른 친구의 입에서 낮은 감탄이 흐른다. 진짜 닮았다며, 혹시 숨겨둔 쌍둥이일지도 모른다는 풍문이 돌고 있댔다. 붉은색 머리카락에 끝이 뾰족하지만 선은 둥근 눈매. 탄탄한 몸과 커다란 입, 짧은 눈썹……. 크게 다른 점은 오른쪽 눈가의 작은 흉터와 날카로운 이였다.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이 안전요원은 아이돌 K군을 닮았다는 명목 하에 초여름부터 여럿 아녀자의 가슴 위로 불을 지폈다. 심지어 성격도 참 좋아서 뜬금없는 사진 요청이나 온갖 질문에도 웃는 낯을 지우지 않는다, 라는 호평이 줄을 섰다. 단언컨데 이 친구들은 화제의 중심인 안전요원의 실물을 영접, 더불어 성공적인 포토타임을 가지기 위하여 워터파크를 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상 침해 아니냐는 생각이 혀 밑에서 굴러다녔지만 굳이 입밖으로 꺼내 트러블을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 
 

처음 친구들의 제안을 들었을 땐 함께 움직일 의향조차 제로에 가까웠다. 괴상한 체질 때문도 있었지만, 사실 얻게 되는 전리품의 가치보다 소모될 시간과 체력이 낭비라는 판단이 더 컸다. 빌어먹을 호기심으로 그 안전요원에 대해 서치해 보지 않았다면, 아마 난 꾀병을 부려서라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쳤을 것이다. 

스트라이크존이다. 

적잖이 확대시킨 탓에 깨질대로 깨진 사진을 보자마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K를 봤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이상야릇한 감각이 발가락 끝에서부터 갈비뼈까지 빠르게 훑어올라간다. 그래, 솔직히 부끄럽지만 나는 그 안전요원에게 첫눈에 반해 버렸다. 굳이 자존심을 내세우며 거짓말 하진 않겠다. 애초부터 아이돌을 닮았기 때문에, 마치 성지를 순례하듯 찾아가는 애들과는 차원이 다른 마음가짐으로 버스에 올라탔다고 보아도 무관하다. 유치한 팬 놀이에 장단을 맞춰 줄 필요가 있었다.



 

 

하염없이 달리던 버스가 멈춘 곳은 으리으리한 규모의 건물 앞이었다. 입구의 건조물은 리조트와 온천을 겸한 탓인지 다른 워터파크에 비하여 두세 배는 더 컸다. 앞에는 새벽부터 늘어진 줄이 뱀처럼 꼬여 사방으로 흐트러진 채였다. 이 뙤약볕에서 몇 시간을 서 있어야 하는 거냐면 그건 또 아니고, 반값 쿠폰을 제시한 친구의 뒷심과 권한이 포함된, 슈퍼패스라는 기가 막힌 예약 기능이 빛을 발했다. 권력의 맛이란 이렇게 달콤하구나. 누군가의 혼잣말에 다들 공감하듯 고개를 주억거린다. 실외 워터파크로 입성하기까지의 과정은, 지루할 정도로 뻔한 것들의 연속이므로 일일이 서술하진 않겠다. 탈의를 하고 가벼운 샤워 후 신상 비키니와 레쉬가드를 입으면 그만이다. 추가로 워터프루프 메이크업과 선글라스를 지침하는 건 센스의 문제겠지. 대규모 워터파크인 만큼, 꽤나 몰린 인파의 소음들이 수면에 튕겨져 귓전을 후려치듯 울렸다. 초장부터 눈 앞이 혼미했으나, 부러 선글라스를 고쳐 쓰곤 최대한 귀를 막았다. 듣지 않으면 그만이겠거니 안일한 대처를 선택한 건, 후폭풍을 예측했을 때 나의 완벽한 불찰이었다.
 

실내는 보통 영유아 전용 풀장과 놀이기구가 있었기에 굳이 뭉그적거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거금을 들인 실외 곤돌라는 파도풀 정면으로, 워터파크의 전체적인 조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자리라 흔히 말하는 명당이었다. 탁 트인 배경과 쏟아지는 바람, 햇볕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 따위에 새삼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듯 보였다. 구름이 걸린 거대한 폭포 조형물을 배경으로 서너 번 카메라 셔터를 누른  뒤에야, 비치된 금고로 물건들을 쑤셔넣을 수 있었다. 이제 가벼워진 몸이 지탱해야 할 건 개인으로 지급된 방수팩 안의 스마트폰 뿐이다. 곤돌라를 빠져나온 무리는 요란한 비명이 점철된 놀이기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목표물만을 찾아 빠르게 눈을 굴렸다. 시간을 지체할 이유는 전혀 없었고 무엇보다 축축이 젖어 추한 꼴로 변하기 전에 얼굴 도장을 찍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 

대형 워터파크인 만큼 모든 길들이 크고 다양했지만 뭣보다 심각한 문제는 '복잡했다.' 지도를 봐도 모호한 것들 뿐이었다. 체력이 동난 친구들은 금세 지친 얼굴로 높은 파도가 울렁이는 파도풀을 배고픈 강아지마냥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선 저 파도풀 안으로 다이빙하는 쪽이 몇 배는 더 공포였지만.
 

별안간 쿠폰을 제시한 친구가 사자후를 내질렀다. 화들짝 놀란 아이들은 콩알만해진 가슴을 쓸어내리며 불안한 눈빛을 숨기지 않는다. 선글라스에 가려 정확히 볼 순 없었지만, 미간을 찌푸릴 대로 찌푸린 모습이라는 것 쯤은 어지간한 멍청이라도 유추할 수 있었을 거다. 억울한 어투를 굳이 숨기지 않은 친구가 입술을 잔뜩 내밀고 삐죽인다.

 

“오늘 그 안전요원 오프래.”


……미친 거 아냐! 누군가가 손에 들린 볼캡을 내동댕이쳤다. 옆을 지나가던 커플 한 쌍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듯 저들끼리 속닥이며 흘긋 시선을 던졌다. 다들 후덥지근하고 시끄러운 공기 속에서 과열된 상태였다. 친구는 휴대폰을 쥔 채로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전요원이 오프인 게 내 탓이야? 왜 나한테 소리를 질러? 맞는 말이다. 안전요원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화가 나지 않을 인물은 누구도 없었다. 심지어 오프의 원인을 들어보자니 갑작스러운 부상이라고 했다. 일을 하던 도중 왼쪽 다리에 제대로 금이 갔다고. 아무리 친구라고 한들 이런 사사로운 소식까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쿠폰을 구해내고 빠른 입장을 추진한 것만으로도 그 친구의 역할은 퍼펙트한 편이었다. 초라하게 바닥을 구른 볼캡을 들어 목까지 붉어진 친구에게 내밀자, 그제서야 각자의 충격이라든지 실망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서서히 수그러드는 것처럼 보였다. 미안해. 불화는 모자를 집어던진 친구가 내뱉은 사과로 종짓점을 찍었다. 두 시간이 넘게 걸려 놀러온 곳에서 피해자 뿐인 싸움만큼 불미스러운 상황이 없다는 걸 다들 알고 있을 테다.


 


 

그리고 나의 고난은 여기서부터였다. 언제 싸웠냐는 듯, 깔깔거리며 물 속으로 뛰어든 친구들이 내 팔목을 잡고 사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무릎 정도 오는 깊이의 물에서 적당히 물장구나 치다가 그늘진 곤돌라에 앉아 쭈쭈바를 입에 물고 쉬는 게 나의 계획이었것만, 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란 말인가. 만류 할 새도 없이 높은 인공 파도가 내 상체를 뒤덮는다. 씨발! 욕이 저절로 나왔다. 구명조끼는 제 역할을 잊은 듯, 하릴없이 물결을 따라 쓸려다니기만 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냐고 따져묻고 싶었지만 조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위이잉. 귓전을 때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몇 차례 파도가 몰아친다. 자아를 잃은 몸뚱이가 인파에 휩쓸리듯 흐들리고 있었다. 귀로 코로 입으로, 얼굴에 뚫린 구멍마다 락스 냄새가 자욱한 물이 들어찼다. 거진 고문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심지어 선글라스의 한쪽 알이 없어진 후였다. 화도 나지 않았다. 친구들이 흩어진 틈을 타 겨우 얕은 물가로 기어나오기 급급할 뿐이었다. 연약한 허벅지가 발발 떨렸다. 곤돌라로 돌아갈 기력조차 전무한 탓에, 파도풀 입구에서 대자로 뻗어 버렸다. 누가 보든 말든 알 바 아니다. 먹은 것도 없는데 배가 불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위가 퉁퉁 불었다. 바람에 실려 흘러가는 구름의 움직임마저 울렁인다. 눈을 감으면 눈두덩이가 쑤셨고 뜨면 어지러웠다. 

 

"A, 괜찮아? 멀미 해?" 
 

 

어느 새 주변으로 모인 친구들이 팔을 잡아 일으킨다. 좀 더 누워 있게 내버려 두라고 말하고픈 기색이었으나, 타인의 따가운 시선을 보자니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나는 게 나을 성 싶었다. 아직 정오도 지나지 않은 시간부터 만취한 주정뱅이가 되고 싶진 않았으니까. 내게 보통을 넘어선 수준의 멀미가 있다는 것 쯤은 나와 제법 가까운 사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콤플렉스다. 약점을 밝히는 걸 달가워 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건 자존심보단 생존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다들 걱정을 올망졸망 달고 나를 부축하는 거겠지. 이대로 곤돌라에 갈까. 하지만 거기도 소음은 여전할 테다. 그러니까 훨씬 조용하고 프라이빗한 공간이 필요했다. 요컨데 학교 보건실 같은, 가만히 누워서 안정을 취하기만 하면 될 그런 장소.
 

 

“그러고 보니까 나 아까 의무실 봤어."

"아, 맞아! 실내 의무실이라고 적혀 있더라."

"리조트 1층에 있는 것 같던데 거기 데려다 줄까?"

 

아, 친구들아. 내가 존나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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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 의무실]
[담당 : 바쿠고 카츠키]
 

 

 

의무실 내부는 제법 넓었다. 이미 몇 개의 간이 침대에는 주인이 있는 듯 두꺼운 칸막이가 쳐져 있었다. 하긴, 이 넓은 워터파크에서 급작스레 아픈 사람이 한둘이겠나 싶었다. 실외엔 천막으로 만들어진 의무실이 있었지만 거기는 말 그대로 응급처치용일 테다. 에어컨은 틀어져 있지 않았지만 덥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친환경 시멘트를 사용한 것처럼 보였다. 정적이 감도는 의무실 오른쪽엔 담당의를 위한 자리가 구비되어 있었다. 문 앞의 명패에 적혀진 '바쿠고 카츠키' 씨와의 첫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인 셈이다. 삐죽삐죽한 금발, 그 밑으로 얉은 은테의 안경을 썼다. 안경 너머의 붉은 동공이 진료 차트를 따라 부드럽게 굴러간다. 

스트라이크존이다. 

어깨에 걸쳐진 의사가운이 무색할 정도로 투명한 피부를 관통하는 햇살 탓에, 숨결마저 반짝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적당히 짙은 눈썹 밑의 잘 빠진 눈매라든지, 굴곡 하나 없이 뻗은 콧대와 다물린 입술이나…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숨쉬는 법을 잊는다는 게 이런 걸까. 바쿠고 씨는, 아니 선생님은 멍청한 표정으로 눈만 커다랗게 뜬 나를 향해 미심쩍다는 눈빛을 쏘아댔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행태긴 했다. 필히 그의 오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 배를 붙잡고 어기적어기적 기어 맞은 편 원형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허리를 숙이고 고개만 들어올렸을 때, 바쿠고 선생님의 오른쪽 눈썹이 가볍게 까딱였다. 아구구……. 반쯤 만들어낸 앓은 소리가 어색했다.
 

 

“제가, 지금 속이 너무 안 좋아서……. 멀미 때문에.”

“…….”

“꾀병 아니고 진짜로. 유달리 위장이 약해요. 조금만 어지러워도 막 토하는데 파도풀에서 하도 굴렀더니.”

“아아.”

 

드디어 납득했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분명 드문 수준의 미남을 보러 오는 꾀병 환자들이 있기 때문에 까다로운 반응을 내비치는 걸지도 모른다. 진료 차트에 무언가를 써내리던 선생님이 표가 정열된 종이를 내민다. 환자 이름, 번호, 보호자 이름, 번호 쓰세요. 고분고분 펜촉으로 얕은 종이를 누른다. 보호자란엔 실내 의무실을 떠올려 준 친구의 이름과 번호를 썼다. 나름대로 감사의 표시였다. 혹시 바쿠고 선생님의 연락을 받은 친구가 날 데리러 의무실을 왔다, 기가 막힌 그의 미모를 보게 되는 행운을 거머쥘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약을 처방 받자마자 물과 함께 삼켰다. 처방이라 해 봐야 증상에 맞는 알약이나 물약 등을 꺼내주는 식이다. 이름을 쓴 차트 옆에 쓰여진 번호는 아마 침대 넘버겠지. 글씨도 정갈하다. 배정된 간이 침대로 걸어가는 내도록 심장이 경박하게 뛰어다닌다. 멀미도 심한 주제에 잘생긴 것 앞에선 멀쩡히 제 역할을 해낸다는 사실이 우스우면서도 얄미웠다. 미남은 만병통치약이라더니, 옛말 틀린 게 하나 없다. 간이침대에 눕자 뒤따라온 바쿠고 선생님이 칸막이 커튼을 쥐고 시선을 맞춘다. 

 

“일단 약기운 돌 때까지 푹 쉬시고 괜찮아지시면 가셔도 됩니다. 대신 나가기 전에 상태 확인 받고 가세요.”
 

 

네. 대답이 끝맺히기도 전에 커튼을 매정히 닫는다. 아쉬움을 품은 한숨이 터졌다. 저 귀한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는데, 이대로 잠들었다가 깨면 끝날 호사라고 생각하니 한시가 아까울 뿐이다. 그때 옆 자리의 커튼이 걷히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리로 으르렁거리며 속삭이는 건 분명 바쿠고 선생님이다. 대화하는 상대는 젊은 남성인 것 같았다. 너 이 새끼……. 집에 안 가? 험한 어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얼굴이 잘나면 욕을 씹어도 섹시하구나,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바쿠고. 나 진짜 아파. 진짜로! 바쿠고 퇴근 때까지만 여기 있을게. 혼자 움직이기 힘들단 말이야. 변성기가 지나 굵직한 성음을 가진 남자는 어울리지 않게 어리광을 부려댔다. 선생님은 징그럽다고 입만 살았다며 타박이다.

 

“그러게 누가 오바 떨랬냐.”

“그치만, 내가 안 다쳤으면 손님이 다쳤을걸!”

“미친 새끼……. 온 세상 사람들 대신 다칠 셈이야?!”

“으악, 바쿠고 쉿! 쉿……! 여기 의무실이야!”

 

거친 숨소리로 씩씩거리던 선생님이 느리게 한숨을 흘린다. 커튼이 살랑이지 않았던가. 눈을 굴려 살폈으나  미동조차 없었다. 한참 더 이어진 속삭임은, 커튼 닫히는 소리와 슬리퍼 끄는 소리를 내며 끝을 맺었다. 아이보리빛의 천장을 바라보던 나는, 선생님과 대화한 남자가 누워 있을 방향으로 얼굴을 돌렸다. 대화 내용으로 유추해 보건데 여기서 일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손님 대신 다쳤다는 말을 보아 안전요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최근에 다쳤다는 풍문이 돌던 안전요원이 누구였더라. 

 

“죄송해요. 시끄러우셨죠……. 이제 조용히 할 테니까 푹 주무세요!”

 

예고없이 커튼을 걷어낸 남자는, 무해한 얼굴로 웃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욕설을 서슴치 않던 선생님 대신 사과하는 모습에서 그의 성격이 얼만큼 다감한지 알 수 있었으나, 웃는 낯에 볼이 눌려 올라간 얼굴을 본 순간 괜찮다는 대답은 커녕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차분히 내린 상태의 붉은 머리카락이 사진과 다르지만 그 아래의 이목구비가 확연했다. 정면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채자마자 뇌가 덜컥였다. 아까는 몸이 고장나더니 이번에는 뇌다. 과부하가 걸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내 표정만으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다는 듯 남자는 어색하게 입가를 올렸다. 뒷머리를 손등으로 문질거리다가 검지를 입술 위에 얹는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저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쥐어짜내 한 마디 했을 뿐이다. 
 

팬...이에요. 

 

웃기고 자빠졌다, 정말.


 

 

의무실에 누워 있는 동안은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휴대폰을 달칵이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어폰이 없었기 때문에 영상을 볼 수도 없었고, 할만한 건 고작해야 웹서핑 그리고 웹툰 정주행 정도였다. 무의미하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마저도 베터리가 20퍼 아래로 떨어진 순간부터 불가능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베터리를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휴대폰을 침대 옆 협탁에 얹은 뒤 눈을 감는다. 이럴 때 시간을 가장 빠르게 흘려보내는 방법은 숙면 외엔 없었다. 선택지가 구렸다. 사실 첫눈에 반했다고 한들 과언이 아닌 잘생긴 안전요원이 옆자리에 있다는 소설 같은 상황 속에서, 잠이 오질 않아 버티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안전요원은 금세 색색이는 숨소리만 흘렸다. 잠든 건가? 몸을 비틀어 방향을 틀었다. 자는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칸막이 커튼이 스스로 걷힐 리도 없었고 매너 없는 행동으로 곤히 잠든 사람을 깨울 의중도 없었다. 분명 그랬다. 내 말은, 몸을 모로 뉘였을 때 드러났던 커튼의 틈은 내 의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안전요원이 걷었던 커튼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듯했다. 위험한 호기심이 눌린 사람을 막을 수 있을 이성은 어디 있을까. 나는 고개를 빼낸 채, 작게 입술을 벌리고 잠든 안전요원의 얼굴을 살핀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한참 숨을 죽인 채 얼굴을 살피던 도중, 슬리퍼 끌리는 소리와 함께 안전요원 자리의 커튼이 요란하게 열렸다. 상대에 대한 배려는 일체 없다는 듯 행거가 밀리는 소음이 동시다발적으로 울렸지만 안전요원은 미동조차 없었다. 오히려 내 쪽이 더 놀랐다. 비명을 지를 뻔 했으나, 손등으로 입을 눌러 막아낸 게 신의 한 수였다. 커튼을 밀어낸 건 예상한 대로 바쿠고 선생님이다. 환자가 누워 있는 자리를 거칠게 열어낼 사람이 선생님 외에 누가 있겠나 싶었다. 선생님은, 아까까지만 해도 욕설을 쏟아붓던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차분한 상태였다. 침대 옆의 휴대용 의자를 끌고온 뒤, 잠든 안정요원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실내인 만큼 바람이 불 리가 없는데 바람 소리가 들렸다. 

 

“키리시마.”
 

 

누가 말한 거지? 나는 눈을 끔뻑였다. 한 번 더 되짚어 보고 나서야 바쿠고 선생님의 입술이 달싹였다는 걸 알아챘다. 모래를 흐드러뜨릴 듯 더운 바람 같은 음성이 조용한 의무실 내부를 낮게 채운다. 키리시마. 그가 읊조린 건 잠든 안전요원의 이름일 테다. 선생님은 멋없이 둘러진 석고 깁스를 바라보다, 그 위에 손을 얹는다. 마치 소중한 걸 쓰다듬는 것처럼 느리게, 손가락 마디마디를 구부리며 쓸어내린다. 선명한 정적이었으나 먹먹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무게감이 몸을 짓눌렀다. 손길은 당연히 가야 할 터를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안전요원의 손등으로 향한다. 힘줄이 툭툭 불거진 손등과 평균보다 흰 피부의 손바닥이 겹친다. 선생님의 입가는 턱을 괸 탓에 비죽 올라간 상태였다. 과연 압력 탓인지, 아니면 정말 웃고 있었던 건지, 일개 환자일 뿐인 내가 알 길은 없었다.
 

의무실은 조용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형광등이 깜빡이는 소리도, 심지어 숨소리조차 미미했다. 실외 워터파크의 물소리나 사람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까지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선생님은 한참동안 안전요원의 손을 잡고 있었다. 놓으면 큰일이라도 난다 생각하는지 잠시도 떼어내지 않는다. 구태여 무릎 위에 차트를 올리고, 한 손만 사용해 기록표를 쓰고 있음에도 잡은 쪽을 움직일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안전요원이 깨어난 건 그리 긴 시간이 지난 후는 아니었다. 여전히 잠에 찌든 얼굴로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은 안전요원은, 습관처럼 선생님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쥐었다. 두 개의 손바닥이 맞붙고, 얽힌다. 놀란 기색도 없는 선생님이 차트에서 눈을 옮겨 안전요원을 바라본다. 반쯤 뜬 눈으로 몽롱히 웃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겠지. 그 눈빛이 얼마나 다정한지, 본인만 모를 테지만. 바쿠고. 이번에는 안전요원이 그를 불렀다. 대답 대신 상체를 숙인 선생님이 그의 이마에 콧잔등을 문질렀다.

 

“다치지 좀 마.”

 

내가 너 뒷바라지 하려고 이러는 줄 아냐. 썩을 자식. 
 

비록 나긋한 어조는 아니었지만, 뜻은 분명히 전달되었다. 작게 웃음을 터트린 안전요원이 턱을 옅게 치켜든다. 시선이 교차하고, 속눈썹이 내려앉고, 다물린 입술이, 그리고……. 



 

 

 

 

 

 

 

/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한참을 누워 있었다. 해가 뉘엿거리며 지는 모습이 창문 너머로 생생하다. 아, 절경이구나. 영혼이 빠져나간 눈으로 어두워질 채비를 하는 하늘을 바라보다,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옆자리는 여즉 유효했다. 선생님은 자리를 옮겼지만 진심으로 함께 퇴근할 작정인지 꿋꿋하게 버티는 저 근성이 용했다. 엉덩이 쥐 내릴 것 같은데, 불평조차 하지 않는다. 미식거리던 속은 진정된 지 제법 오래였다. 언제 울렁였냐는 듯 고요한 게 태풍의 눈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선생님은 책상에 앉아 볼펜을 사각거리며 비품 목록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흘러내린 안경이 콧망울에 걸렸다. 나는 그의 앞에 선 채로 우물쭈물, 입가를 우그러뜨렸다. 나를 먼저 발견한 건 선생님이었다.

 

“어때요.”

“……많이 괜찮아졌어요.”

“여분 약 더 드릴 테니까, 혹시 안 좋으면 또 드시고.”

 

아, 저 무심한 자상함. 비록 나에겐 오롯 비즈니스적인 관계일 테지만 저 안전요원에겐 애정의 표본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괜히 입 안이 씁쓸했다. 낄 수준도 안 되는 주제에 실연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서랍에서 꺼낸 약을 능숙히 피스별로 구분한 뒤, 종이봉투에 담는다. 비타민 음료와 함께 쥐여진 봉투는 바스락거리며 까슬한 소리가 났다. 이후론 가벼운 목례. 의무실 문을 열고 다시 닫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동안, 선생님은 다시 종이더미 위로 눈을 옮겼다. 나는 그런 모습을 빠짐없이 담는다. 탁. 그리고 혼자였다. 복도에 선 채로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습관처럼 휴대폰의 홀드를 제거하자 기다렸다는 듯 친구들의 전화가 쏟아진다. 진동모드여서 다행이라는 부수적인 생각을 하며 전화 버튼을 길게 눌렀다.
 

응, 응. 지금 의무실에서 나왔어. 로비에서 볼까? 꼬치에 맥주 괜찮을 것 같은데.
 

통화를 하며 돌린 시선 끝에 의무실 하단의 이름이 걸렸다. 담당, 바쿠고 카츠키. 옅은 금발머리. 짙은 눈매와 적안. 커다란 입은 항상 꾹 다물려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서 웃는 얼굴의, 붉은 머리카락과 단단한 몸. 잡은 손. 두드러진 뼈. 손목, 엄지와 검지의 깊은 골. 크게 벌어지는 입술. 그래, 입술. 내려앉은 얼굴 두 개가 맞닿는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지고. 나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었다. 

 


 

……정말이지.


 

“나라서 다행인 줄 아세요, 조심성 없는 미남들아.”
 

 

 

제가 이렇게 매너 있는 사람이랍니다. 

편안한 위를 손으로 문지르며 가벼운 발걸음을 재촉한다. 로비엔 친구들이 모여 날 기다리고 있을 테다. 돌아가는 길은 끔찍하겠지만, 그래도 순간을 즐기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친구들은 안전요원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숨기진 않으나, 당위성을 부여하자면 우연찮게 안전요원과 마주친 이쪽이 더  충격적인 상태였다. 물론, 말은 하지 않겠다. 그게 그들을 위한 최선의 선택일 테니까. 애초에 그들에게 있어 모브1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걸로 끝이다.


 

아, 가서 맥주나 진탕 마셔야지.



 

​합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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