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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울

초록의 계절은 돌고 돈다

written by 무울

 

 

 

  시원한 바람이 마음에 드는 오후다. 이런 날에는 사진을 찍거나 시를 쓰고는 했다. 기록을 끊임없이 해왔다. 그만둘 수 없었고 그만둘 수 없었던 이유를 찾아 헤맸다. 그랬더니 이것은 습관과 같은 것이었고 일상 그 자체였다. 세상이 빛나보였고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가슴 벅찼다. 제게는 재능이 있었고 인정받아 왔고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져 있었다. 행복하다-

 

  그렇게 자신에게 되뇌었다. 매일 같이. 나는 행복하다고, 아픔 따위 인식조차 할 수 없도록.

 

 

  나는, 사랑을 모른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한 달인가.

 

  같은 강의를 듣고 옆자리에 앉던 이 여자와 사귄지가 벌써 그렇게 되었나.

 

  어쩌다 마음이 맞아 같이 밥을 먹게 되었고 그 횟수가 늘어갔고 카페를 함께 가고 웃는 얼굴이 예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는 말했다. 제게 눈이 참 예쁘다고. 남자에게 할 칭찬인가 하고 웃음이 나왔다. 함께 있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편하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 때 만났고 식사를 하고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의 집으로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봄이지나 여름이 다가왔다.

 

  “ 나도 전시 보러가는 거 좋아해 ”

 

  좋아하는 사진작가의 전시가 곧 있다는 이야기를 하니 자신도 좋아한다고 대답해왔다. 들떠있는 눈치였다.

 

  “ 관심 있으면 같이 가도 상관없지만 다리 아프다고 불평하진 마라 ”

  “ 괜찮아! 나도 보러 다니는 거 꽤 좋아하니까 ”

 

  만날 날짜와 시간을 잡았다. 평소와 같이 시간이 흘러 약속한 날이 되었다.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화창한 날씨였다. 뭉게구름이 펼쳐져 있는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 눈이 시릴 만치 빛나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찾아간 곳에는 파티의 흔적으로 어수선한 테이블 뿐으로 어디에도 전시 포스터는 붙여져 있지 않았다. 날씨는 땡볕.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같이 온 이 여자는 혼자 신나서 방방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나는 혀를 차며 따라 다니기 바빴다. 알고 보니 전날 웨딩파티를 한 곳이더라. 분위기에 서로 머쓱해져 감을 느끼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뭐, 착각한 건 어쩔 수 없지. 바다가 근처인 곳이었다. 들리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해서 따라가 보니 전망이 좋은 해변가 쪽이었다. 문제는 길이 별로 좋지 못했다. 왜 하필 이렇게 위험한 곳을 가고 싶어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날씨는 더웠고 보고 싶었던 작가의 사진전은 보지 못했고 안 그래도 좋지 못한 기분인데 가는 길의 발밑은 불안정했다. 이 여자는 뭐가 좋아서 펄쩍펄쩍 거리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싫은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날씨가 좋아서였을까. 평소 나답지 못했던 것도 같다. 부드러운 바닷바람에 조금 기분이 좋아진 것일지도 몰랐다.

 

  “ 앗-! 휴.. 고마워, 바쿠고군. ”

 

  역시나 여자는 발을 헛디뎠고 잡아주면서 해변가로 내려가게 되었다. 아아, 왜 멀쩡한 길을 놔두고 이런 길을 가는 건데. 자신은 등산을 취미로 하고 있어서 괜찮았지만 이 여자에게는 힘든 길이었다. 드디어 다 내려오니 백사장에는 반짝이는 모래 알갱이들과 조개껍데기들로 가득했다. 하늘도 바다도 반짝이는 조개껍데기들도 모두 아름다웠다. 짜증이 났었던 것도 잠시 이 풍경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아무래도 좋아지는 것이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멍하니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다. 여자가 갑자기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설마, 혹시.

 

  “ 바쿠고군.. 좋아해..! ”

 

  왠지 그렇지 않알까 하고 막연히 생각은 했었다. 오늘 처음 듣는 떨리는 목소리에서 평소와는 다름을 느껴졌다. 이름을 불리고 조금 뜸을 들일 줄 알았는데 거침없이 고백을 해 와 조금 놀랐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고백을 받았지만 고백이란 것이 이렇게 무드가 없는 것이던가. 그런 시덥잖은 생각을 했다. 이름을 불리고 얼굴을 바라보기 그 짧은 순간에 든 생각이 그러했다. 하지만, 눈을 바라보는 그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당황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던 내가 이 때 처음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너를 좋아하는 걸까. 그 것조차 확신 할 수 없었다. 말과 눈은 확연히 달랐다. 그녀의 눈빛에서 감정이 전해져 왔다. 너무나 낯선 감정이어서 시선을 어디에 맞추어야 할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당장 대답을 할 필요는 없다고 그녀가 말했다. 돌아가는 동안에 처음으로 그녀와의 시간이 어색함을 느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직 알 고 지낸지 한 달 조금 남짓이다. 그녀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를 안 지 그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어디를 보고 고백을 한 것일까.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눈을 감았다 떠봐도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한 밤 중, 나는 그녀에게 전과 같은 관계로 지내자는 문자를 했다. 자신의 감정을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태로 사귈 수도 없고 그러한 상태로 연인다운 행동을 할 수도 없다고 대답하고는 휴대폰을 덮었다. 이제 끝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장문의 답장이 돌아왔다.

 

  - 바쿠고군.. 난 갑자기 연인 행세를 해달라는 의미로 고백을 한 건 아니었어.. 서로를 좀 더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주면 안 될까..? 바쿠고군과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아. 바쿠고군은 항상 빛이 나고 열심이야. 그런데 종종 외로운 느낌이 들어..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무엇이든 능숙했고 자신이 있었다. 그런 내게 누군가가 걱정을 한다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답지 않게 감동하고 말았다. 한 번 정한 일을 바꾸는 일이 없던 나였다. 바꾸는 것은 의지가 약했다는 것이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이날은 내 인생에 아마도 처음으로 가장 감정적이었던 날이었지 않았을까. 한 번 찼음에도 나는 그녀의 두 번째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우리는 바쁜 한 달을 보냈다. 그래도 매주 같은 강의를 들었기 때문에 한 주에 한 번은 만나게 되어있었다. 나는 과제와 시험과 여러 가지 이유로 피곤이 쌓여갔다. 그녀와의 다툼은 대부분 나의 가차 없는 말들이 원인으로, 한마디로 너무 직설적인 탓이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의 행동들에 공감하지 못하는 일이 많아졌다. 같은 수업을 듣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보게 되어 있는데 굳이 찾아와 함께 식사를 하려는 그녀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 지금에 들어섰다. 고백 후 처음으로 하는 데이트가 오늘이었다. 그녀는 한껏 단장을 하고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만나기 전과 후의 기분이 다르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녀와 영화를 보고 익숙한 듯이 식사를 했다. 우리는 사진을 함께 찍었다. 이것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처음이 쌓여갈 수 록 모호했던 무엇인가가 선명해져 갔다. 나는 그녀와는 다른 마음인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데 한 달이라는 시간은 충분한 시간이었다. 한 달을 사귀었지만 우리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나의 마음도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있기 불편해져만 갔다. 나와 그녀의 마음은 나날이 날라져만 갔으니까. 첫 데이트에 이러는 것은 그녀에게는 미안한 짓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식사 후 카페에서 나는 그녀에게 헤어짐을 고했다. 그녀는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발걸음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기분이 좋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싶을 만치 상쾌한 기분이었다. 미안하지만 미안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친구로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던 우리의 관계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무엇 하나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작가라는 감성적인 직업을 목표로 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몰랐다. 누군가와 연락을 자주 하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와의 관계는 어째선지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으로 얼룩져 갔었고 더 이상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마음 편한 일이었다. 대학에 붙고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던 자신이다. 누군가와 한 달을 사귀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발전이었다. 이제는 그럴 일 더는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음 강의실에 발을 디뎠다. 잠이 덜 깬 멍청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바쿠고 카츠키. 3학년인데 그쪽은 어떻게 되죠? ”

  “ 1학년에 키리시마 에이지로라고 합니다! ”

 

  ‘ 목소리 하나 만큼은 씩씩하네. 1학년이라서 그런가? ’

 

  바로 옆자리였지만 이제껏 대화 한번 해본 적이 없던 상대였다. 강의가 시작하고 수 분후에 골아 떨어지던 녀석. 인사조차 해본 적 없었던 녀석과 말을 섞게 된 것은 한 학기 마지막을 장식할 조별발표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듣는 녀석의 목소리는 매번 졸음을 못 이기고 꾸벅꾸벅 졸던 표정과는 정반대로 우렁찼다. 들어보니 같은 학과다. 붉은 머리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는 헤어스타일이 이목을 끄는 외관.

  이런 바보 같은 머리를 한 녀석이 후배라니.

 

  “ 쯧- ”

  “ 네? ”

 

  아, 순간 혀를 차버렸다. 아무렴 어때. 이 조별 발표 때문에 나는 연이 없을 줄 알았던 그와 번호를 교환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귀찮기만 할 줄 알았던 상대가 조금씩 다르게 다가왔다. 우리는 공적인 이야기만 했을 뿐이지만 신기하게도 대화가 즐거웠다. 이 녀석이 보기와 다르게 꽤 열심히 였으니까. 이 수업은 교양일 뿐이었지만 녀석은 내가 3학년이고 자신이 1학년 인 것에 상당히 부담을 느끼고 자신이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교양임에도 몇 날 며칠을 밤새 자료를 조사했고 자신이 맡은 파트를 준비했다. 그래서 종종 과제를 하다가 찡얼대는 문자를 보내도 마냥 귀엽게만 느껴졌다. 녀석의 찡얼거림은 놀고 있지 않다는 증거였다. 누군가의 열정이 느껴지면 자연스럽게 스스로도 기분이 좋아지게 되어있다. 같은 팀인 녀석이 논팽이 같은 근성이었다면 매 주 이 시간이 끝나고 멱살을 잡고 참교육을 시켰을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키리시마 에이지로라는 후배는 할 때는 하는 그런 녀석이었다. 그리고 곧 잘 웃는다. 처음에는 바보 같다고 생각했던 헤어스타일도 조금은 어울려 보일지도 모르겠다.

 

  “ 야, 뭐먹고 싶냐. 열심히 하는 거 같으니까 밥 한 끼 정도는 사줄 수 있어 ”

  “ 정말요?!! 아.. 하지만 오늘은 안 될 거 같아요.. 짐을 위에 두고 와서 가지러 가봐야 하다 보니.. ”

 

  기복이 정말 심한 녀석이다. 엄청 들떴다가 급 시무룩해지는 표정을 보면 이게 그렇게 까지 슬퍼할 일인가 싶어진다. 잠깐이잖아 그거.

 

  “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어 ”

  “ 네?! 그래도 여기서 제일 먼 강의실인데 바쿠고씨를 밖에서 기다리게 할 수는..!! ”

  “ 잔말 말고 빨리 갔다 오기나 하라고! ”

  “ 네!!!! 우왓?!! ”

 

  허겁지겁 뛰어가다가 넘어질 뻔 한 뒷모습이 우스워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았다. 희한한 녀석이다. 기다리는 동안 구경이나 하고 있을까. 해가 지려고 하고 있지만 아직은 이곳에 있고 싶어지는 저녁이었다.

 

  ‘ 키리시마, 매운 거 좋아 하려나 ’

 

 

 

 

  ‘ 바바바쿠고씨랑 저녁식사!!!?! ’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키리시마는 동경하던 선배와의 식사가 믿겨지지가 않아 흥분되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뛰어서 그런 게 아니라!

  바쿠고 카츠키. 그는 과내에서도 여러 가지 의미에 눈에 띄는 모범생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언제 어디서든 신출귀몰하기로 소문이 자자한데 새벽에 우연히 바쿠고를 목격한 학생들의 제보에 의하면 대체 그는 언제 집에 가냐, 학교에서 산다는 말은 농담이 아닌 게 아닐까 라는 말을 하고는 했다.

 

  ‘ 문제는 아침 일찍 온 학생들도 바쿠고씨를 봤다고 하거든... ’

 

  집에 갈 채비도 하고 밥 먹으러 가자고 했으니까 기숙사에 사는 거 같지는 않았다. 바쿠고에 대한 생각으로 스쳐지나가는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음은 저 아래 선배에게 두고 온 채 키리시마는 제 짐이 있는 강의실을 향해 발길을 서둘렀다.

  강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니 세로가 혼자 머리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 시간 꽤 늦었는데 아직 레포트 쓰고 있구나.. ’

 

  사실은 키리시마 역시 다시 강의실에 돌아와 레포트를 마저 작성하고 갈 예정이었다. 그래서 들고 다니면 짐이 될 무거운 교재와 노트북들을 다 두고 다음 교양 수업에 바로 간 것이었는데 바쿠고와의 저녁식사라는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 급하게 짐을 가지러 올라오게 된 것이었다. 집에서 마저 하면 되. 저 아래에서 혼자 밤바람을 맞고 기다리고 있을 바쿠고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강의실을 나서려는 순간, 키리시마는 세로의 sos에 정신이 아찔해 졌다. 들어보니 레포트를 끝마치기는 했는데 조금 불안해져서 피드백을 해줬음 한다는 부탁이었다. 오래 걸릴 거 같지는 않았다. 읽어보고 내 생각을 이야기 해 주면 되는 그 뿐인 일이었다. 키리시마는 제 나름대로 최대한 빨리 읽어내려 갔고 자신의 생각을 짧게 전했다. 세로의 감사의 인사를 뒤로하고 서둘러 바쿠고를 향해 달려 나갔다. 내려가면서 시간을 다시 보는데 키리시마는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줄 만 알았다. 그가 빨리 다녀 와라고 한 지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첫 식사를 하는 상대에게 그것도 선배에게 이건 정말 아니었다. 어떡하지 기다리다가 지쳐서 돌아갔으면 어떡하지. 어떡하지-

 

  “ 바쿠고씨!! ”

 

  주변을 둘러보니 삼삼오오 모여 떠들썩한 거리 어디에도 바쿠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긴장 해 힘이 들어가 있던 주먹에서 힘이 풀려 나갔다. 지쳐서 돌아간 것일까. 누구를 탓할 수도 없이 그저 아까까지 여기에 서 있었던 바쿠고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 때였다. 등 뒤에서 익숙한 볼멘소리가 들려온 것은.

 

  “ 늦어 ”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틱틱 대는 바쿠고지만 지금만큼은 그가 짜증을 내 주는 것이 기쁘고 안심 되서 어쩔 줄 몰라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키리시마였다. 늦은 것에 대한 사과를 열심히 하고 둘은 저녁을 먹으러 천천히 걸어 나갔다. 키리시마는 올라가는 입 꼬리를 내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 시간이나 늦어 놓고 히죽대면 성격파탄으로도 유명한 바쿠고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기분이 상할 법 했다. 괜히 오해를 사기 싫어 최대한 들뜬 기분을 누르고 뭘 먹을지에 대한 화제로 넘어갔다. 라면 어때? 좋아요! 오랜만에 먹는 라면인데 너무 맛있겠다, 먹으러 가 봐요 얼른!

 

  바쿠고는 사실 키리시마를 기다리면서 그와의 식사가 생각보다 불편하거나 어색하면 어떡하지 싶어지기 시작했었다. 괜히 답지 않게 먼저 말을 건 것이 아닌가 하고 어떤 얼굴로 그와 식사를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여태껏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으니까 먼저 다가가는 것이 익숙하질 않았다. 인간관계에 있어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은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그렇다고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만큼 치명적인 단점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마 그 때문에 이전에 사귀던 여자와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거겠지. 인간관계는 단순 할수록 관리하기에 좋았다. 그렇다 보니 남들이 봤을 때는 정말 별거 아닌 일임에도 바쿠고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아 한없이 미궁인 경우로 다가오고는 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은 시간낭비라고 생각 하면서 벌써 한 시간째 같은 생각이 쳇바퀴 돌 듯 제 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다.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던 때에 저 멀리서 뛰어 내려오는 키리시마의 붉은 머리칼이 보였다. 허겁지겁 내려오는 모습을 보니 조금 골려주고 싶어져 기둥 뒤로 뒷걸음질을 쳤다. 녀석은 자신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 못 해 했다. 화난 척 하고 말을 거니 빨개진 얼굴로 늦어서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를 하는데 아까까지 어색하면 어쩌지 싶었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어색함이 누그러들었고 그와의 시간에 천천히 녹아들어갔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기분 좋았다. 자신과 같은 맵기의 라면을 굳이 주문해 먹던 키리시마의 표정은 정말이지 걸작이었다. 무리해서 먹지 말라고 얘기를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결국은 그릇의 바닥을 제게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퉁퉁 불어터진 입술로 맛있네요, 바쿠고씨! 라고 저를 처다 보는데 우스워서 먹던 라면을 도로 뱉을 뻔 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일일이 다 기억나지 않을 만큼 쓸데없는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했던 것 같다. 차가운 바람이 시원한 밤. 시끌거리는 거리에서 네온 싸인이 번쩍였다. 그때마다 키리시마의 옆얼굴이 색색이 물드는 듯 했다. 그의 반짝이는 눈빛이 자신의 눈동자를 들여다봐서 바쿠고는 순간 고개를 저어버렸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함께였다가 키리시마를 먼저 배웅하고 바쿠고는 멀어져 가는 버스를 말없이 바라봤다. 키리시마가 탄 버스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지켜보다가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해 보니 하루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발표는 그야말로 성공적이었다. 그럼에도 바쿠고는 이제까지 이런 적이 없었을 정도로 초조했다. 키리시마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이렇게 짧았다니. 선후배라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관계도 아니었다. 둘은 같은 학과지만 사실상 전공이 달랐다. 비슷한 위치의 다른 건물에서 수업을 듣는 것이다. 학교에 거의 살다 시피 빠져있는 바쿠고가 우연히 밖에서 그것도 키리시마가 다른 강의를 듣기 위해 이동을 할 때 그 동선에서 마주칠 수 있는 확률은 안타깝게도 한없이 제로에 수렴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떻게든 만날 명목을 만들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 머리를 아무리 굴려 봐도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교양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것 이외에 더 좋은 명목은 떠오르지 않았다. 바쿠고는 몇 날 며칠을 고민했는데도 별다른 대책 하나 내 놓지 못한 제 머리에 상당히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키리시마의 태도는 한 결 같이 밝고 명쾌했다. 저 시원시원한 면상을 더 바라보고 싶은 마음과 이 강의가 종강하고 나면 더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하루 이틀 쌓여만 갔다. 그런 제 마음을 키리시마 앞에서는 모른 척 아닌 척 무심하게 대하기를 반복했더니 심장에 엔진이라도 달린 것 마냥 뛰어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이게 뭐야, 뭐냐고. 스스로가 어처구니가 없고 한심했다. 이런 자신을 키리시마에게 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들키고 싶지 않다고 바쿠고는 생각했다.

 

  그와 함께 돌아가는 동안에 바쿠고는 갑자기 생각나는 척을 하며 찾아본 맛집들을 하나씩 읊었다. 다음에는 여기를 가볼까, 여기는 어때, 여기도 괜찮겠네. 만날 날짜와 시간을 확실히 잡은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약속을 잡는 것만 같아져서 바쿠고는 떨리는 심정을 참아가며 말 뿐인 약속들을 내뱉고는 했다. 키리시마는 뭐든 사양을 모르는 녀석이었다. 정말로 그 게 먹고 싶은 건지 그냥 선배의 기분에 맞춰 주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언제나의 텐션으로 힘차게 그러고 싶다는 긍정의 대답을 들려줬다. 항상 정해져 있는 버스 정거장에서 키리시마를 먼저 배웅하는 일이 마치 일과처럼 되어 버렸음을 느꼈다. 함께 있는 동안에는 열을 띄던 맛집들의 이름들이 키리시마를 보내고 나면 거품이 되어 허공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과제와 자유 탐구 논문을 위해 발걸음을 학교로 돌렸던 지난 나날과는 달리 매주 이 시간 만큼은 학교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 스스로의 행동과 이 감각이 바쿠고는 너무나 낯설었다. 매 주 보는 녀석의 얼굴이 질리기는 커녕 배웅을 하고 나서도 아른거린다니 제게 있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던 것이었다.

  갑자기 이전에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여자가 떠올랐다. 나는 그녀가 연락을 자주 하고 싶어 했던 이유도 함께 밥을 먹으려고 악착같이 찾아 왔던 이유도 그 무엇 하나 이해할 수가 없었었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치부해 왔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바라는 게 없던 자신이었다. 그것은 연인 사이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사실은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을 포기해 왔었어.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기대하지 않으려고 했어. 사랑한 존재가 자신에게 빈자리를 만들고 멀어지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 존재가 없어도 내가 괜찮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었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을 때 나는 가장 상처받지 않아도 되었다. 누군가에게 기대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기대하는 만큼 그렇지 못했을 때 실망이 배가 되는 법이었다. 그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집작이었는지 사랑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런 닮은 종류의 사람과 결별하고 나는 강해지기 위해 기대라는 단어를 지워왔다. 그런 내가 가슴을 떨면서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다니. 어떡하면 좋냐, 야. 키리시마. 가르쳐줘 어떡하면 되는 거냐 이런 건.

 

  “ 보고 싶다고, 멍청아.. ”

 

  기말 테스트는 다 다음 주. 다음 시간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키리시마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테스트를 치고 나면 누구나가 고대하는 여름방학의 시작이다. 나만이 그것을 바라지 않고 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수업 시간이 찾아왔다. 다음 주 이시간이 1학기 기말 테스트였기 때문에 오늘은 일찍 수업을 마쳤다. 상식이 있다면 지금은 시험기간이다. 서로 공부하러 갈길 가는 것이 맞아. 하지만 바쿠고의 머릿속은 ‘ 하지만, 그렇지만 ’ 이라는 단어로 도배되어져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평소보다 말 수가 적었고 표정이 안 좋아 보였던 것은. 키리시마는 바쿠고에게 이제 어디로 가는지를 물었다. 학교로 다시 올라가겠지 싶었던 선배가 오늘따라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집으로 가냐는 질문에도 명쾌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 바쿠고를 보고 혹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닐까 싶어졌다. 무언가 고민이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대로 가다가는 버스정거장에 도착해 버려. 키리시마는 무언가 마음을 먹고는 바쿠고를 불러 세웠다.

 

  “ 바쿠고씨, 잠깐 이쪽으로 같이 가봐요 ”

 

  갑자기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잡아끄는 키리시마로 인해 바쿠고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너무 당황스러우면 아무것도 못 느낀 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바쿠고는 그렇게 설레서 마지못했던 키리시마 본인과 손을 잡고 있음에도 그 사실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아 사고가 굳어버렸다. 그리곤 어디로 가는 거냐는 대꾸조차 못한 상태로 좁은 골목으로 끌려들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런 곳이 있었다는 사실을 몇 년째 모르고 살았구나 싶었지만 키리시마가 너무 콧대가 높아지는 것 같아 쓸데없다고 핍박을 줘버렸다. 그래도 녀석은 전혀 기죽지 않고 제게 다양한 보드게임들이 정리되어져 있는 메뉴판을 보여주며 이것저것 설명해 줬다.

  처음으로 하는 보드게임이었지만 바쿠고는 쉽게 룰을 익히고 이겨나갔다. 쩔쩔 매는 건 오히려 키리시마 쪽이었다. 악마 같은 미소를 짓는 바쿠고에게 우는 소리를 하는 키리시마였고 자비와 배려 그리고 무르기란 단어가 사전에 없는 바쿠고로 인해 끝내 모든 판에서 지는 꼴을 면치 못했다. 주사위조차 바쿠고의 편을 드는 것만 같아 야속한 기분이 잠깐 들었지만 바쿠고의 표정이 아까와는 달리 부드러워 진 것 같아 키리시마는 기분이 좋아졌다. 선배의 그런 그늘진 얼굴, 보고 싶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끌고 와버렸는데 그가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슥슥

 

  “ 뭐냐..? ”

  “ 아. 먼지가 묻어 있어서 때어냈어요 ”

 

  먼지. 먼지. 바쿠고는 중얼거리면서 납득했다. 그래 먼지가 있었나봐. 어떻게든 이해를 해야지만 맨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먼지가 머리에 묻었고 그걸 털어내 준 것 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진정해. 심박이 관자까지 전해졌지만 모르는 척 하고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익숙하게 저녁 식사를 함께 했고 카페를 갔고 이제 정말로 돌아 가봐야 할 시간이 되었다. 시험공부 마무리 잘하고. 네-, 다음 시간에 봬요!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길로 돌아섰다.

 

 

 

 

 

 

  일주일 만에 들어선 교양 강의실은 시험 분위기로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익숙하게 키리시마에게 인사를 하고 옆에 앉았다가 한 테이블 당 한 사람씩 앉도록 교수에게 주의를 받고 말았다.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정신 차려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키리시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게 눈웃음을 짓고는 앞 테이블로 자리를 이동하는 것이다. 갑작스런 행동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같으면 시험대열로 앉지 않고 덜컥 옆에 앉아 버린 내 쪽이 다른 자리로 이동을 해야 하는 게 맞는 거다. 그런데 일찍 와서 앉아 있던 키리시마 쪽이 일어서다니. 자신이 말리기도 전에 앞 테이블 쪽으로 가버려서 말 붙일 틈도 없었다. 앉아서 책을 들여다보는 빨간 머리 녀석의 등을 바라 봤다. 방금 전 눈웃음이 또 잊혀 지지가 않아 심장이 위험했다. 곧 시험이 시작하는데 정신 차리라고 바쿠고 카츠키.

 

  답안에 쓸 내용이 생각보다 복잡했다. 제길, 귀찮게 하고 있어. 모르는 문제는 딱히 없었다. 가장 배점이 높은 문제에서 조금 시간이 걸릴 거 같다- 그 정도 일 뿐이었다.

   힐끗-

  앞자리에 앉아 있는 키리시마의 등을 눈으로 쫒았다. 녀석이 앞자리에 앉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 뒷자리로 가서 앉았더라면 나는 시험 치는 내도록 녀석이 시험을 다 치고 나갔는지 아직 이곳에서 함께 시험을 치고 있는지가 신경 쓰여서 시험에 제대로 집중을 못했을 수도 있었다. 키리시마가 시험을 다 치고 밖으로 나가기까지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이 꽤나 안심되었다. 나가는 모습을 본 후에는 헛된 희망을 품지 않아도 되었다. 이 시험이 끝나는 순간이 종강을 의미했으니까 공식적인 그와의 자리는 안녕인 것을 의미했다. 필기구 소리만이 들리던 강의실에서 결국 그 순간이 찾아왔다. 키리시마는 답안지를 제출하고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나도 더 이상 그의 뒷모습을 보기위해 고개를 들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시간만 걸리는 귀찮기만 한 문제를 마저 풀고 답안지를 제출하니 마음이 편안했다. 강의실을 나가기 위해 문을 여니 끼익- 하는 쇳소리와 함께 자연광이 복도 창을 통해 환하게 들어와서 눈이 부셨다.

  눈을 깜빡이니 그 곳에서는 나간지 한참이나 된 키리시마 에이지로가 창가에 기대 서있었다. 바쿠고씨! 시험 잘 쳤어요? 라고 해맑게 물어오는 키리시마 때문에 순간 눈을 의심했다가 심장이 또 괴로워졌다.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냐고. 마지막까지 예측을 할 수가 없는 녀셕이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채광과 키리시마의 미소가 너무나 빛나 보였다. 또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어. 설레는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익숙한 듯이 함께 건물을 빠져 나왔다.

 

  “ 있어줘서 고맙다 ”

  “ 네? 뭐라고 했어요? ”

 

  아니, 아무것도-. 에이 그러지 말고 가르쳐 주세요, 바쿠고씨! 우리는 평소랑 다르지 않는 대화를 하면서 밥을 먹으러 갔다.

 

  “ 저번에 바쿠고씨가 말했던 거기 가 봐요 거기! 가게 이름이 음.. 잘 기억은 안 나지만! ”

  “ 그 정도는 한 번에 기억해둬, 멍청아 ”

 

  그 때 집으로 돌아가는 너와 함께 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했던 혼자만의 약속이 너의 한 마디에 진짜가 되어 돌아왔다. 그 사실이 너무나 기쁘지만 티는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려고 한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면 안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건 어쩌면 벌일지도 몰랐다. 나를 좋아해준 여자의 기분을 이제는 온전히 이해 할 수 있다. 와 닿지 않았던 그녀의 말 하나 하나가 생생하게 되돌아 왔다.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이제야 처음으로 너를 이해한 기분이 든다.

  키리시마를 좋아하게 된 것에 후회는 없다. 오히려 내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준 그가 너무나 고맙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고만 여겨왔다. 누군가에게 기대하지 않고 기대지 않는 것이 강함이라고 여겨왔다.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었음에 깨달았다. 잃는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아 도망쳐온 것 뿐 이라는 사실도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키리시마를 좋아하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 마음을 소중히 여기고 살아갈 수 있다.

 

  “ 고맙다. 키리시마. ”

  “ 뭐가요? ”

  “ 간장. 건네줘서 고맙다고 ”

  “ 뭘 그런 걸 가지고 고마워해요. 새삼스럽게 ”

 

  언제 시간 되면 자신이 좋아하는 닭요리를 하는 곳에 가보자는 이야기를 하며 그러자고 맞장구쳤다. 아마, 이제 너와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이성적이지 못했던 한 학기가 이렇게 끝이 나고 또다시 우리는 서로의 길을 향해 나아갔다.

 

 

 

 

 

 

  벚꽃의 꽃말이 중간고사라고 한다면 방학과 함께 찾아오는 것은 무더위이지 않을까. 바쿠고는 방학이 들어섬과 동시에 학기 중에는 잘 하지 못했던 등산 플랜을 짜고 있던 참이었다. 이번에는 이 코스로 가볼까. 체크를 끝낸 타이밍에 문자 알림이 왔다.

 

  “ 키리시마? ”

 

  키리시마로 부터의 문자였다. 마음을 접은 지 4일 동안은 힘들었지만 일주일에 접어드니 이전과 같이 생활할 수 있었다. 그랬는데 이건 뭐냐. 지금 뭐하냐고? 등산갈 준비 하고 있다만?

  그렇게 답장을 보내니 자신도 그 플랜에 끼워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아니 얘가 갑자기 왜 이래? 그렇게 등산에 관심이 있었나? 등산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도 안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까지 좋아한다는 느낌은 별로 안 들어서 딱히 오래 얘기하지는 않았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하고 싶다고 거리는 키리시마는 처음으로 보는 거 같은데. 누군가와 함께 등산을 하는 것은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갑자기 또 기분이 이상해져 명치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아직 괜찮아. 방학을 한 지 일주일. 키리시마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얼굴도 보지 않은 시간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일주일을 견뎌보니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을 거 같아졌다. 키리시마에게 이 날 갈 거 다고 통보 식으로 말하니 자신도 그 날 시간이 되니까 같이 가고 싶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그러던가- 하고 휴대폰을 덮었다. 칼같이 답장이 날아와서 보니 신이 제대로 난 모양이었다. 물어보는 것들이 앞뒤 맥락 다 빠뜨려놔서 열이 뻗친 나머지 전화로 욕지거리와 함께 다시 써서 보내라고 불호령을 내려버렸다. 전화를 끊고 잠깐 정적. 정신이 듦과 동시에 얼굴이 서서히 뜨거워져갔다.

 

  ‘ 제정신이냐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화를 걸긴 왜 걸어!!! ’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키리시마와 등산을 함께 하게 된 거지? 의문스러웠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찝어 준 대로 최소한의 필요한 도구들을 잘 준비해 와서 칭찬 아닌 칭찬을 해주고 산을 타기 시작했다. 코스도 조금 바꿔서 평소에 비하면 나들이 수준이 되어버렸지만 키로(km) 수만 따져보면 그렇게 막 만만한 것도 아니었다. 여름의 산은 싱그러움으로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위만 바라보며 올라가다가도 한 번씩 돌아서서 얼마나 올라 왔는지를 바라보는 키리시마가 귀엽게 느껴졌다. 그러다가도 순간 아차 싶어져서 얼굴을 휙 젓고는 빨리 오기나 하라고 소리쳤다. 혹시라도 키리시마가 자신의 표정을 보고 제 마음을 알아 챌 지도 몰라 황급히 심호흡을 했다. 녀석과는 친구로 지내겠다고 마음먹었다.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마음이 부담스러웠다. 싫지는 않았지만 사랑하지는 않았다. 같은 마음이 될 수 없었던 것에 죄책감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미안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녀의 마음에 보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해방감을 느끼고 말았다. 키리시마에게는 그런 기분 절대로 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마음은 들켜서도 고백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키리시마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을 타일렀다.

 

  “ 바쿠고씨 얼굴이 빨개요 ”

  “ 꽤 올라왔으니까. 뭔데. 또 뭐가 묻기라도 했냐? ”

 

  키리시마가 바쿠고의 붉어진 뺨을 쓸었다. 피부가 하얘서 붉어진 뺨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바쿠고는 이런 돌발적인 행동에 제 마음이 농락되는 것이 싫어서 속으로 릴렉스를 수도 없이 되뇌었다. 이 녀석의 이런 행동에는 아무 의미도, 무엇도 없다고 생각하려고 최대한 노력 해 보지만 두 손으로 얼굴을 잡고는 쉬이 안 놓아주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바쿠고였다. 한 마디로 바쿠고는 지금 키리시마가 얼굴을 놓아줄 때 까지 긴장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에 놓여버렸다. 키리시마는 함박웃음을 짓고는 바쿠고의 뺨을 놓고 그를 제쳐 위로 올라가버렸다. 어이가 없어진 바쿠고는 명치를 쓸면서 짜증을 토해냈다. 바쿠고는 키리시마의 행동에 머리가 핑 돌아서 솔직히 말해 짜증도 제대로 내지를 못하겠는 기분이었다.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는 새끼야-! 속으로는 멱살을 잡고 두어 번 패고 있었다. 실제로는 얼굴을 쳐다보기도 힘드니 속으로라도 패야만 했다. 그 상판 때기를 콱.

 

 

  정상에 올라오니 갈대밭으로 이루어진 능선의 아름다움에 키리시마는 입이 떡 벌어 졌다. 바쿠고는 말없이 풍경에 시선을 때지 못하는 키리시마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갑자기 뒤돌아 설까봐 허겁지겁 카메라를 쥔 손을 거두었다. 키리시마는 푸른하늘을 배경으로 해밝게 웃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바쿠고씨!! 굉장해요!! 어, 알고 있어-

  우리는 그 근처 바위에 앉아 오래간만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또다시 나눴다. 저기가 제 고등학교였구요- 저기가-...

  이런 곳 까지 이 녀석과 함께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정말 사람 일이란 건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였다. 키리시마의 목소리가 약간의 뜸과 함께 미세하게 떨렸다.

  키리시마?

 

  “ 바쿠고씨, 저.. 역시 바쿠고씨가 좋아요 ”

 

  녀석은 그렇게 내뱉고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라는 거냐 대체.

 

  “ 지금 뭐라고 그랬냐..? 뭐..? 너가..? 누굴? ”

  “ 티 많이 안 났었나요 저?.. 이상하네.. 남들은 제가 티가 많이 난다고 그러던데.. ”

 

  키리시마는 난처해 하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만지작 거렸다. 대답을 하고는 싶은데 벙쪄서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러니까 너가, 나를, 좋아한다고? 뭐야, 뭐냐고. 자꾸 말을 잇지를 못하니까 걱정이 되었는지 재차 물어보는 키리시마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제발 그 입 좀 닥쳐봐, 진정이 안되잖아.

 

  “ 하..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대체.. 그럼 너도 나 좋아했다고.. ”

  “ 바쿠고씨는요? ”

 

  뭐 하러 그걸 굳이 물어보는 건데. 이 자식 이거 알고 보면 다 알고 이러는 거 아냐? 어?? 그걸 지금 물어봐? 뒷목을 잡고 싶은 심정이 들기를 잠깐, 할 말은 확실하게 해야겠다 싶어졌다.

 

  “ 잘 알아들어 이 눈새야. 나도 좋아한다. 너보다 훨씬 전부터 좋아했다! 알아 들었냐 이 미친놈아. 사람 헷갈리게 하는 새끼.. 난..고백할 생각.. 없었다고.. 알아 들었어..?.. ”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니 네가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키리시마도 어째선지 눈가가 붉어진 듯 해 보였지만 어느 때 보다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내게 보여주었다. 나도 눈물이 날 만치 기뻐. 네가 내게 그랬듯이 이제는 웃어 보이고 싶다. 내가 감정을 보여주더라도 너가 상처받지 않는다면 이제는 숨길 필요가 없는 거겠지.

  그럼, 우리 사귀는 거네요? 라고 물어보는 키리시마의 볼을 꼬집어서 잡아끌었다. 아파서 웅얼거리는 녀석을 놓아주고는 곧바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가 키스를 했다. 볼이 그렇게 아팠냐? 울쌍이 된 녀석의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로고 계절이 돌고 돌았다. 우연히 키리시마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발견하고는 잠시 감상에 잠기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은 정말 믿겨지지 않는 일들의 연속이었던 여름이었다. 바다에서의 그녀와의 일들도, 산 정산에서의 너와의 일들도 모두 따뜻하고 소중한 기억이고 가치 있던 시간으로 내게 자리 잡았다. 푸르고 녹빛으로 출렁이던 그 때 그 순간의 향기와 반짝임을 나는 분명 시간이 아무리 흐르더라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언제까지고, 분명.

 

 사랑을 알게 된 초록의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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