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지향
“더워.”
입에서 저절로 탄성 아닌 탄성이 흘러나왔다. 옷깃을 잡아 펄럭거리며 조금이나마 몸에 흐르는 땀을 식히려 했으나, 바람 한 점 없는 이 상황에 시원해지는 건 역시 무리였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에 좌우로 몇 번이고 고개를 흔들다 마주한 바쿠고의 시선에는 열기만이 가득 차 있어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야 이 더위를 버텨내기엔 이 공간은 너무도 더웠다. 더울수록 불쾌지수가 늘어난다지만 특히나 이런 상황에선 더더욱 올라갈 수밖에.
위잉. 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기 시작한 게 며칠 전부터였더라. 이미 초여름은 저 일찍부터 왔다지만 벌레 소리를 몇 번이고 참을 정도로 두 사람은 참을성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잠을 잘 때도 계속 들려오는 날개짓 소리에 정신의 한계는 이미 예전에 왔을지도 모른다. 사실 키리시마는 어제부터 바쿠고의 상태를 계속 의식했다. 어제 저녁, 일을 마치고 도착한 집이 어쩐지 더운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에어컨을 켜는 게 일상이 된 바쿠고인데 온몸으로 느껴지는 더운 공기에 거실로 향하자 에어컨 리모컨의 버튼을 강하게 내리누르는 바쿠고의 모습이 보였다. 잔뜩 짜증 어린 얼굴로 움직이는 분노의 손짓을 보며 키리시마는 짐작했다. 에어컨이 고장 났다. 당장 업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무슨 연유인지 손이 부족해 이틀 뒤에나 올 수 있다고 했다. 이틀만 버티자며 바쿠고를 설득하고 자리에 누웠던 저녁은 그야말로 고통이었다.
'바쿠고. 정말 끌어안으면 안 돼?'
'안돼.'
덥다며 달라붙지 말라고 짜증내는 바쿠고에 결국 그를 끌어안지 못하고 키리시마는 혼자 벽 쪽으로 둥글게 돌아누웠다. 곧 등 뒤로 색색거리며 고른 숨을 내쉬는 소리에 바쿠고가 잠들었다는 사실을 안 키리시마는 그제야 뒤돌아 잠든 바쿠고를 바라보았다. 집에 들어오기까지 키리시마는 꽤 들떠있었다. 시간의 여유가 생겼으니 내일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조금 더 붙어있고 싶었다. 더 늦게 잠들고 싶었는데 기계처럼 정확한 바쿠고는 오늘도 어김없이 제 시간에 잠에 들었다. 덥다면서 불평하면서도 역시 피곤했었던 거다. 그동안 쉬지도 못하고 무리하게 일했을 그를 알기에 키리시마는 그가 깨지 않을 정도로 살포시 그를 안았다 떨어졌다. 그나마 소파로 안 내쫓긴 게 다행이었다. 일어나면 바로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으니까. 내일부턴 여름 휴가의 시작이다. 에어컨이 고쳐지면 분명 계속 달라붙을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시작한 여름 휴가의 첫날이었지만, 키리시마의 생각대로 이야기는 잘 풀리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여유롭게 일어나 느긋하게 아침밥을 준비해 먹으며 어디라도 놀러 갈까 라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바쿠고도 의외로 싫은 기색을 내지 않고 밥 먹으며 조용히 키리시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대화를 깨듯이 위잉, 하며 날아온 모기는 둘의 시야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화가 끊기며 침묵이 이어졌다. 긴장감과 함께 키리시마가 마른 침을 한번 꿀꺽 삼키는 순간, 바쿠고의 손이 앞으로 뻗어졌다. 어느 때보다도 빠른 동작이었다. 짝. 하고 뭉개버리는 듯한 강한 힘을 실은 박수. 이건 분명히 잡았구나, 하던 키리시마의 생각을 우습다는 듯이 다시 작은 날갯짓이 들리며 바쿠고의 손 틈 사이로 모기는 날아올랐다. 그 뒤, 몇 번 허공에 손뼉을 친 바쿠고였지만 대체 무슨 생명력인지 모기는 절대 죽지 않고 오히려 그런 바쿠고를 놀리듯이 그의 주변을 맴돌며 더 시끄럽게 날아다녔다.
“쳐죽인다.”
분노가 절정에 오른 바쿠고는 땀샘을 확장하듯 손을 넓게 폈다. 바쿠고의 생각을 읽은 키리시마는 그를 말리려 일어났지만 이미 늦었다. 바쿠고는 모기 쪽으로 작은 폭발을 날렸다. 폭발하지 말라던 아파트 관리인 씨의 꾸중이 키리시마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일단 모기를 없애면 바쿠고의 짜증은 줄어들겠지, 하고 폭발속에서 바쿠고를 바라보던 키리시마는 위로 날아오르는 지독히도 긴 생명력을 가진 작은 생물에 혀를 찼다. 정말이냐. 아직 살아있음을 안 바쿠고는 험한 얼굴을 하며 모기를 노려보았다. 어린아이들이 봤으면 당장에라도 울어버렸을 표정이다. 본격적으로 히어로 활동을 하면서 히어로는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한다 라는 방침에 따라 바쿠고도 나름 얌전히 지내고는 있다지만 그 성격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서 여전히 험한 얼굴은 그대로였다. 반대로 그 얼굴이 먹히고 있어서 웃긴다면 웃긴 포인트지만.
“바쿠고. 내가 이쪽으로 유인할 테니까 그 틈에 공격해”
그렇게 말하며 키리시마는 식탁에서 일어나 거실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모기가 빨강 신호를 따라 멈추듯 키리시마 쪽으로 이동한 채 앞에서 머뭇거렸다. 씩 웃으며 제 쪽으로 다가오는 바쿠고를 보며 마치 재미있는 장난을 앞에 둔 어린애 같다고 생각했다.
“죽어!”
다시 한번 폭발과 함께 굉음이 퍼져나갔다. 이걸 버텨내면 이젠 모기의 경지를 넘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기대를 저버리듯 귓가를 간질이는 날갯짓 소리가 조심스럽게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정말 포기해야 하는 거 아닌지. 아니면 모기약을 사 와서 뿌린다던가. 여차하면 코다에게 부탁하고 싶은 심정에 이르렀다. 고민에 잠긴 키리시마를 두고 바쿠고의 분노는 절정에 달해 얼굴은 완전히 험한 건달 같은 인상으로 변하였다.
“키리시마. 오늘 여기에 살아있는 새끼들 전부 족친다.”
“그치만 오늘 쉬는 날인데,”
“그러니까 한다. 다 죽여주지!”
뭐든 마음먹으면 절대 멈추지 않는 올곧은 성격. 그런 바쿠고인걸 알기에 키리시마는 결국 포기했다. 그 길로 곧장 슈퍼에서 벌레 퇴치제를 사 온 바쿠고는 온 집안에 병에 있던 모든 액체를 다 쏟아냈다. 그 탓에 집안은 이상한 냄새로 가득 차고 키리시마는 바닥에 떨어진 벌레들을 일일이 휴지로 줍고 다녔다. 여름이라지만 아직 한여름은 아닌데. 지금도 더운데 한여름이 되면 얼마나 더운 걸까. 벌레도 지금보다 더 꼬이겠지. 그때의 바쿠고가 어느 정도의 분노로 휩싸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결국, 휴일 첫날을 전부 모기 잡는 거로 써버렸네.”
“하. 이제야 겨우 잘 때 조용하겠네.”
“그래서 만족했어?”
“어. 처음 녀석 족쳤으면 됐어.”
바쿠고는 맨 처음의 모기가 가장 곤란했던 거다. 바쿠고가 원래 이상한 부분에서 집착이 심하다는 건 알지만 그런 모습마저 귀엽게 보인다고 하면 분명 그에게 혼나겠지. 처음 녀석은 정말 죽은 건가?
“너랑 자고 있는데 시끄러운 게 끼어들어서 짜증 났다고. 망할!”
“어? 나랑 있는데 방해받아서 짜증 났던 거야?"
“아?”
뭘 당연한 걸 물어 같은 표정을 하는 바쿠고에 키리시마는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어제 덥다며 안고 자지 못하게 한 게 사실은 서운했다. 덥더라도 모처럼 얻은 여름휴가인데 그와 종일 붙어 있을 것을 생각하며 돌아왔던 집. 그러나 현실은 잔인해서 에어컨이 고쳐지지 않는 상황에 집안에 더위는 침투해 결국 그와 처음부터 붙어있는 걸 실현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런 모기를 잡는 상황까지. 사실은 데이트라던가, 연인이 할 법할 일들을 이 휴일 동안 다 해보고 싶었던 키리시마다. 같이 살면서도 일 때문에 매번 늦게 돌아오는 터라 밥도 삼시 세끼 같이 먹을 수 없고 얼굴 마주 보는 것도 부족했다. 그나마 그런 키리시마를 위로해줬던 게 한 침대에서 같이 자면서 끌어안는 거였는데 여름이 다가오면서 바쿠고가 덥다는 이유로 그의 행동을 제한해왔다. 그래도 밀어붙이면 결국엔 지쳐 들어주는 편인데, 어제는 정말로 더워서 참을 수 없었던 듯싶다. 그에게 더 밀착하며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바쿠고는 애써 키리시마를 떼어내진 않았다. 덥다, 라고 한 마디 중얼거렸을 뿐 강하게 팔을 빼거나 하진 않았다. 격하게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키리시마나 바쿠고 둘 다 몸은 끈적거리고 있었다. 그야 이런 날씨에 에어컨은 되지 않고 모든 벌레를 잡겠다고 혈안이 되어 온 집안을 돌아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같이 샤워할까?”
평소의 바쿠고라면 싫다고 단호하게 거절하겠지만,
"그거 괜찮네."
뜻밖의 대답에 키리시마는 큰 눈을 떴다.
"정말 괜찮아?"
"하고 싶은 건 너였잖아. 아니면 빈말이었냐."
"아니! 하고 싶습니다!"
급하게 대답하며 키리시마가 빠르게 윗옷을 벗자 재밌다는 듯 바쿠고는 웃었다.
"기껏 여름휴가니까 할 건 다 해봐야지."
마치 키리시마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머릿속의 말을 이야기하는 바쿠고에 키리시마는 멍하니 그가 옷을 벗는 걸 바라봤다. 그런 키리시마의 표정을 보던 바쿠고가 먼저 욕실 쪽으로 향하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물 닿으면 들러붙어 있어도 덜 덥겠지."
그 말에 신난 어린애처럼 키리시마는 바쿠고의 뒤를 따랐다. 여름휴가 첫날이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아직 며칠이나 더 남았으니까. 내일은 어디라도 나가보자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