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히어로
두꺼비(@shoto_DK)
보글보글 끊는 냄비의 뚜껑을 열자, 냄비 속 갇혀있던 연기가 퍼져나가며 냄새로 주방을 가득 메웠다. 바쿠고는 그 국의 간을 본 뒤, 거실에서 히어로 데쿠의 인형을 가지고 놀던 소녀를 향해 들릴 정도의 크기로 말했다.
“가서 바보 깨워 와라.”
검은색의 머리가 포니테일로 묶인 채 눈매는 바쿠고를, 입은 키리시마를 닮은 두 히어로의 딸인, 히우는 시선을 인형에 고정시킨 채 시큰둥하게 말했다.
“싫어.”
“좋은 말할 때 가라.”
바쿠고의 말에 불만이 가득한 것인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키리아빠 내가 깨워도 안 일어나는걸...”
제 딸이 키리시마를 이름이 아닌 성을 줄여 키리아빠라고 부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바쿠고는 한숨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역시 일곱 살인 딸에게 저 새끼는 무리인가. 하는 수 없이 바쿠고는 국자를 내려놓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뭐가 그리 좋은지 옆으로 누워 베개를 끌어안은 채 헤실헤실 웃고 있는 키리시마에게 다가가 발로 허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야, 일어나.”
키리시마는 중얼거리듯 5분만을 외치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바쿠고는 억지로 화를 삼키며 한 번 더 그에게 기회를 줬다.
“지금 안 일어나면 뒤진다.”
기다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미동조차 없던 키리시마의 모습에 바쿠고는 주먹을 쥐고 깨어날 때까지 때리려고 했던 순간 색다른 방법이 하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디 한 번 뒤져봐라. 방을 시원하게 해주고 있던 에어컨의 전원을 끄고 리모컨을 숨긴 뒤, 햇볕이 강한 탓에 숨 막히는 공기가 창문을 열자 점점 방 안을 메우기 시작했다. 어디 한 번 잘 버텨봐라. 마지막으로 두툼한 겨울용 이불을 들고 온 바쿠고는 키리시마 위로 이불을 폈다. 그리고 방을 나와 그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키리시마는 영문도 모른 채 점점 숨이 막혀오는 더위에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더워!!!”
이불이 그의 얼굴 위에서 걷어지자 부족했던 공기를 먹듯이 크게 여러 번 숨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봄으로써 그제야 상황이 정리된 키리시마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땀을 흘리며 문 손잡이를 잡고 돌리자, 무언가에 막힌 듯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라?”
키리시마는 당황하며 손잡이를 위아래로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작은 움직임만 있을 뿐 여전히 열리지 않아 문을 주먹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바쿠고!”
바쿠고는 밖에서 손잡이를 꽉 잡은 채 문을 사이에 두고 그에게 말했다.
“뭐.”
“미안해. 그러니까 이것 좀 열어줘. 나 더워 죽겠어.”
“뒤지던가.”
키리시마는 문밖에 있는 바쿠고를 향해 애걸복걸하며 사과를 십여 분 동안 하고 나서야 간신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거실 에어컨에서 땀을 식히던 키리시마는 잠시 후 부엌에서 나는 냄새에 이끌리듯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에 놓인 반찬들이 눈에 들어오자 배에서 소리가 나 얼른 의자에 앉았고, 이어 히우가 와 의자에 앉았다. 바쿠고는 밥을 그릇에 퍼 식탁에 옮기고 나서야 의자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키리시마와 히우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을 어느 정도 입안에 넣은 채 두 쌍의 젓가락이 향한 곳은 고기였다. 두 사람의 행동에 바쿠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밥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마지막 고기를 놔두고 실랑이가 벌어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바쿠고가 나섰다. 두 사람의 젓가락 사이로 제 젓가락을 들이밀어 고기를 집고 자신의 입안으로 넣었다. 그렇게 바쿠고에게만 다소 조용했던 아침식사가 끝이 났다.
바쿠고가 안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모습에 히우를 안고 있던 키리시마가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어? 바쿠고 어디 가?”
“쿠고아빠 어디 가?”
부녀가 나란히 고개를 갸우뚱하며 똑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바쿠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일.”
키리시마는 그 말에 놀라 본인도 히어로면서 일을 나가는 이유를 물었다. 그렇기에 바쿠고는 그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네놈이랑 내가 둘 다 주말에 쉬면 빌런은 누가 잡냐. 키리시마는 머리를 굴리다 이내 빌런도 쉬지 않을까라고 말했다가 바쿠고에게 머리를 한 대 맞았다. 결국 둘에게 인사를 하고 바쿠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집에 덩그러니 키리시마와 히우만 남았고, 바쿠고가 없다는 사실에 쓸쓸하고 허전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도 잠시 잔소리하는 이가 사라지자 자유를 만끽하는 둘이었다. 아빠, 치사해!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야. 평소 비디오 게임의 시간을 정해두고 했던 둘이지만 그가 없자, 지금이 기회라는 듯이 두 사람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게임의 전원을 켰다. 키리시마는 자신이 엄청 아끼는 딸이라고 해서 봐주는 거 따위 없었다. 남자의 승부에는 봐주는 거 따윈 없어. 난 여자잖아! 그의 말에 히우가 태클을 걸어봤지만 소용은 없었다. 결국 0승 6연패라는 결과가 나자, 히우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울음이 터지기 일보 직전임에도 키리시마는 좋아하며 키득키득 웃고 있다가 이내 자신의 딸의 상태를 확인했다.
헉?! 크, 큰일이다...! 바쿠고 없으면 잘 안 그치는데.
키리시마는 속으로 생각하면 뭐 하냐는 듯이 자신을 자책하고 긴장하며 조작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애써 미소를 보이며 히우에게 말했다.
“우리 딸! 배 안고파? 우리 게임은 이제 그만하고 핫케이크 먹을까?”
먹을 것으로 달래보려 하자, 히우는 눈물이 맺힌 채 고개를 돌려 흥미를 보였다.
“핫...케이크?”
키리시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핫케이크라고 한 번 더 말하자, 점점 미소를 보이는 히우였다. 키리시마는 안심하며 아이의 눈물을 휴지로 닦아주었다. 그러자 바쿠고를 닮아 자존심이 센 아이였기에 연신 자신은 안 울었다며, 오늘은 컨디션이 나빠진 것이라며 우겨 됐다. 키리시마는 핫케이크를 굽는 내내 알겠다며 아이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두 사람은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소파에 등을 기대고 편안하게 앉았다. 서로서로 주고받듯이 맛있었다를 반복하다가 이내 히우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아빠, 아빠.”
키리시마는 배부른 탓에 풀린 표정으로 왜라고 대답하자 히우가 소파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서서 말을 이었다.
“사나이다워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해?”
어? 뭐라고? 키리시마는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재차 묻자 똑같은 질문이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키리시마는 당황하며 그것이 왜 궁금한지 묻자, 히우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애들이 놀렸단 말이야....”
....뭐? 키리시마는 최대한 표정관리를 하며 히우에게 누가 그랬는지 물었다. 그러자 히우는 반 남자애들이라고 말할 뿐 자세히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있을 학부모 참관수업 때 제대로 찾으리라 맹세하고는 히우가 굳이 왜 남자다워 보이려 하는지에 대해 궁금했다. 그러자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나이다워 보이면 세 보이잖아. 히어로 데쿠처럼! 그래서 남자애들한테 무시 안 당하려고.”
그 남자애들을 어떻게 혼내줄까 생각하면서도 딸의 발상에 마냥 귀여운 키리시마는 히우가 하기에 쉬울만한 답을 내려줬다.
“사나이답게 보이려면 카리스마지!”
“카리스마? 카리스마....”
히우는 중얼중얼 단어를 되새기는가 싶더니 이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정리를 마쳤다. 미간을 힘껏 찌푸리고 입을 모아 앞으로 삐죽 내밀었다. 바쿠고다!! 키리시마는 바쿠고와 판박이인 히우의 모습을 보곤 아이가 마음 상하지 않게 속으로 웃으며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억지로 참았다. 히우는 고개를 돌려 몸을 작게 들썩이는 그의 모습에 표정을 풀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를 불렀다. 안 돼. 히우를 위해서라도! 키리시마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곤 고개를 돌려 히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아이 앞에서 연기를 펼쳤다.
“히우는 카리스마 하면 안 되겠다.”
히우는 놀라 그에게 왜 자신은 안 되는지 따지듯이 묻자 키리시마는 진지한 표정으로 아이에게 말했다.
“너무 무서우니까.”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히우는 눈을 동그랗게 떠 몇 번 깜빡이고는 얼굴에 미소가 돌기 시작했다.
“정말? 진짜? 나 무서워?”
“진~짜 무서웠어, 히우. 그러니까 하지 마.”
잠시 혼자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아까 그 표정을 다시 한 번 더 보였다. 키리시마는 순간 웃을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무섭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의 연기에 속은 히우는 활짝 웃어 어디론가 황급히 뛰어갔다. 어디 가는 거지? 키리시마는 뒤늦게 히우의 뒤를 따라가 보자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황급히 휴대폰을 찾으러 갔다. 히우는 키리시마와 바쿠고가 자는 방에 놓인, 화장품이 별로 놓이지 않아 깔끔한 화장대 앞 의자에 올라가 거울로 자신의 표정을 확인했다. 미간을 찌푸렸다가 입술을 내밀기도 했고, 표정을 풀어 제 눈썹을 매만지기도 했다. 그런 히우의 모습을 키리시마는 방 밖에서 카메라로 연신 찍어가며 혼자 몰래 웃었다. 히우에게 들키지 않게 말없이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혼자 보기 아까우니까.
키리시마는 찍던 걸 멈추고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휴식을 취하던 도중 울리던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자, 키리시마였다. 무시하려다 저번에 확인을 안했다가 스무 통 이상 온 일이 생각나 혀를 차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가 보낸 동영상과 사진에 바쿠고는 옅은 미소를 보였다. 딸이나 아빠나.
사나이다운 히우!
바쿠고는 메시지 창에 띄어진 사진과 동영상을 눌러 자신의 갤러리를 채워나갔다.
그리고 그날 집에 들어가자마자 히우의 카리스마와 키리시마의 눈치에 무서운 척 연기를 펼쳤다. 하지만 바쿠고의 연기에 히우는 한동안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않았다.
***
먼저 씻은 키리시마를 시작으로 바쿠고와 히우가 같이 씻고 나와 세 명이 쪼르르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오가는 말없이 TV를 보다 히우의 눈이 점점 감길 때쯤 키리시마가 말을 꺼냈다.
“아, 바쿠고. 자기 전에 영화 한 편 볼래?”
뜬금없이 무슨 영화냐 묻자, 낮에 결제한 영화를 시간이 없어 못 봤다고 대답했다. 바쿠고는 이어 오늘 아니면 볼 시간 없을 거 같다는 키리시마의 말에 하는 수 없이 승낙했다. 그래서 바쿠고가 졸려하던 히우를 방에 데리고 가 재우려 고개를 돌리자, 히우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바쿠고는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이 되어 먼저 선수를 쳤다.
“안 돼.”
“나 아직 말도 안 했어!”
“영화 보고 싶다고 할 거잖아.”
히우는 자신이 하려던 말을 간파당해 몸을 움찔 떨고는 바쿠고를 향해 반항을 시도해봤다.
“시, 싫어.”
“하아?!”
히익. 바쿠고의 표정에 살짝 겁을 먹은 히우는 바쿠고 뒤에 있던 키리시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키리시마는 집에서 서열 꼴등인 탓에 아이를 도와줄 힘이 없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걸 인지한 히우는 몸을 작게 떨며 주먹을 꼭 쥐었다.
“아빠들이랑 영화 보고 싶단 말이야. 그리고 같이 자고 싶어... 매번 아빠들 늦게 들어오잖아. 혼자 자는 거 싫어.”
밖으로 내뱉어진 히우의 속마음에 둘은 잠시 굳었다. 어느 정도 걱정되고 신경 쓰이던 부분이지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기에 이런 생각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키리시마의 눈짓에 바쿠고가 한숨을 내뱉었다.
“오늘만이다.”
“응!!”
시무룩해 있던 히우는 표정이 밝아지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바쿠고는 고작 영화 하나로 좋아하는 아이의 모습에 작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한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키리시마는 조금 불안했다. 저기.... 바쿠고와 히우는 키리시마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히우, 영화... 봐도 괜찮을까?”
히우는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왜? 난 아빠들이랑 보는 거면 다 좋아!”
“무슨 영화인데. .....너 설마!?”
바쿠고의 눈빛에 키리시마는 당황하며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런 영화 아니라고!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키리시마의 변명과도 같은 말에 바쿠고는 살짝 의심하면서도 표정을 풀고 무슨 영화인지 재차 물어봤다. 키리시마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공포영화. 바쿠고와 히우는 잠시 움찔 몸을 떨었다.
거실의 불을 끄고 TV에서 흘러나오는 빛에만 의존한 채 세 사람은 소파에 앉았다. 키리시마는 영화에는 팝콘이라며 과자를 가져오려 했지만 늦은 시간에 먹는 걸 싫어하는 바쿠고에 의해 제재 당했다. 입이 심심했지만 바쿠고를 이길 자신이 없어 조용히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의 배경음악이 긴장을 고조 시키자 한껏 집중하는 키리시마와 달리 바쿠고와 히우는 긴장상태를 유지했다. 그런 분위기가 계속되던 도중 공포영화답게 갑자기 피를 묻힌 귀신이 TV화면을 가득 메우자, 넘버 2의 히어로 폭살왕과 그의 딸 히우는 소리를 질렀다.
“씨발!!!!”
“으아!!!!”
“으억.”
히우는 놀라 키리시마의 품으로 숨듯이 머리를 가슴팍에 박고 그를 꼭 껴안았다. 다급했던 탓에 머리로 세게 박아 키리시마는 컥컥거리며 자신의 머리카락에 고통이 느껴져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바쿠고는 놀라 소파 뒤로 황급히 뛰어 넘어가 키리시마의 뒤에 서서 그의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바, 바쿠고? 나 머리 아픈...”
“닥치고 앞에 봐.”
키리시마는 고개를 앞으로 돌려 다시 영화에 시선을 옮겼다. 히우는 키리시마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돌려 힐끔힐끔 영화를 시청했고, 바쿠고는 영화에 눈은 때지 않았지만 놀랄 요소가 등장하게 되면 그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아악!! 바, 바쿠고! 아파! 아프다고.”
“씨발!!! 꺼져!!”
“으아 아빠!!!”
그날 이후 집에서 다 같이 공포영화를 시청하는 일은 없었다. 혹은 키리시마 혼자 새벽에 보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다음날 키리시마는 푹 잔 두 사람과 달리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바쿠고와 함께 일을 나갔다. 히우는 오후에 학교가 끝나고 혼자 아무도 없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밤늦게 들어온 두 사람은 빨리 오거나 쉬는 날을 제외한 대부분 히우의 자는 모습을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바쿠고와 키리시마는 밝게 웃고 떠드는 히우의 겉모습에 속아 자신의 아이가 본인들을 이해해주는 것으로 생각해 조금 안심했다. 하지만 매일 밤 히우는 혼자 자신의 베개를 적셔갔다.
***
바쿠고는 설거지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려 거실로 들어서자 키리시마와 히우가 서로를 쳐다보며 티격태격 싸우고 있었다. 말려볼까라는 생각 따윈 없는 바쿠고이기에 벽에 기대어 멀리서 둘을 지켜봤다.
“데쿠가 짱이야!”
“미도.... 데쿠도 물론 세지만 아빠도 세거든!”
“아니야. 데쿠보다 센 히어로는 없어.”
조만간 데쿠 새끼랑 결판낸다. 바쿠고는 미도리야에게 진 기분을 느껴 자신의 딸에게 누가 더 센지 똑똑히 보여주자 다짐하며 둘이 하는 대화를 들었다.
“아빠 개성 세지도 않잖아. 그래서 내 개성도 이렇게 이상하고.”
“내 개성이 어때서?! 강력한 창이 될 수도 있고 방패가 될 수 있다고.”
그럼 뭐 해. 돌멩이인데... 히우의 중얼거리듯이 내뱉은 마지막 말에 키리시마는 발끈해 자신의 딸을 상대로 본인도 놀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히우는 부싯돌이잖아.”
히우의 개성은 바쿠고와 키리시마의 개성을 정확히 반으로 나뉘어 가졌다. 제 몸을 경화시킨 후, 경화된 부분과 맞닿으면 폭발이 일어나는 개성이었고 힘을 실어 세게 치면 칠수록 폭발력이 올라갔다. 그렇기에 키리시마는 히우의 개성을 부싯돌이라 놀렸다. 그 아빠에 그 딸이라 생각하고 보고 있던 바쿠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결국 둘 다 돌이네. 정곡이 찔린 듯이 둘은 움찔 놀라며 바쿠고를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부정했다. 뭐가 아니냐? 둘 다 돌 맞잖아. 바쿠고는 두 사람을 향해 비웃듯이 옅은 미소를 보였다. 키리시마와 히우가 서로를 바라보다가 바쿠고를 향해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었다.
“그러는 바쿠고는 다혈질이잖아.”
“마자! 화날 때 막 빌런같아!”
속이 풀린 듯이 그를 놀리고 나서 미소를 보였지만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할 말은 다 했냐. 바쿠고는 천천히 한걸음 한걸음 발을 내디디며 다가갔다.
“헉. 바, 바쿠고?”
“아, 아빠?”
주변 분위기가 싸해지고 바쿠고가 고개를 숙인 탓에 표정이 보이지 않아 불안했다. 속으로 큰일 났다를 되새기며 바쿠고의 반응을 기다렸다. 혹시 그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진 않을까 바라기도 했다.
“돌에서 재가 되고 싶냐! 아?!”
그것은 키리시마와 히우의 바람일 뿐이었다. 바쿠고의 폭발을 피해 땀과 함께 온 집안을 뛰어다니면서 다시는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자 맹세를 하지만, 이 맹세는 매번 오래가지 않았다.
시끄러움도 잠시 머리를 한 대씩 맞고 집안은 일방적인 평온함을 되찾았다. 에어컨이 틀려 밖과는 다른 온도 속에서 세 사람은 흘렸던 땀을 식히듯 소파에 앉아 바람을 쐬었다. 그러다 문득 히우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빠들 일 안가? 빌런 잡으러 안가?”
바쿠고와 키리시마는 서로를 바라보고는 다시 히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휴가 받았다.”
“바쿠고가 억지로 받아낸 거지만... 이틀간 히우랑 하루 종일 놀 수 있어.”
휴가 기간 안에 그동안 못 놀아준 만큼 실컷 놀아주기로 결심한 바쿠고와 키리시마는 기뻐하는 히우의 반응에 뿌듯하면서도 미안함을 느꼈다.
“그럼 아빠 나랑 히어로 놀이하자! 내가 데쿠야. 아빠는 빌런 해.”
명색에 히어로지만 딸을 위해서 빌런이 된 키리시마는 히우에게 건네받은 인형을 받고, 데쿠 피규어를 든 히우의 뒤를 쫓아갔다. 빌런따위 절대 되지 않겠다 고집을 피운 바쿠고와 혼자만 히어로를 하겠다 고집을 피우는 히우탓에 바쿠고는 소파에 앉아 둘을 지켜봤다. 이제 너는 잡힐 운명이다, 빌런. 그러니 순순히 어, 음.. 히우가 자신의 기준으로 멋지게 대사를 내뱉던 도중 단어가 기억이 나질 않아 말문이 막히자, 키리시마가 속삭였다.
“항복.”
“아, 항복. 순순히 항복해라!”
키리시마는 그에 맞춰 본인의 대사를 외쳤다. 화기애애한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깜빡 잠이 든 바쿠고는 귓가에 들리는 소리에 인상을 썼다. 시끄러워. 소리에 잠이 서서히 깨 눈을 뜨려던 도중 갑자기 자신의 몸 위로 묵직한 느낌이 들며 옷이 축축하게 젖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뭐, 뭐야?! 바쿠고가 황급히 눈을 뜨자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제 몸 위에서 히우가 울고 있었다. 바쿠고는 한숨을 작게 내뱉고 아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줬다.
“왜?”
히우는 천천히 고갤 들어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키리아빠가... 키리아빠가 데쿠, 데쿠를....”
끝내 억지로 참고 있던 눈물을 터트려 말은 끊기고 말았다. 왠지 불안한데. 바쿠고는 히우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이며 키리시마를 찾아 집안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가 발견된 곳은 히우의 방이었다.
하아. 저 병신.
방에 들어서자마자 바쿠고는 어떤 상황인지 듣지 않고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의 두 손에는 히우가 가장 아끼는 데쿠 피규어의 머리와 몸이 분리된 채 쥐어져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해. 엄청난 공포가 휘몰아친 듯한 그의 표정과 중얼거림에 바쿠고는 또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키리시마.”
자신의 성에 반응하여 고개를 돌리자 바쿠고를 보고는 눈물을 글썽였다.
“바쿠고.”
키리시마는 바쿠고의 등장에 조금 마음이 놓이며 그에게 설명하려 했지만, 바쿠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거 팔하고 다리 한쪽은 왜 부서졌냐?”
몸을 쥐고 있던 탓에 보이지 않던 부분이 본인에게 손을 펼쳐 보여준 덕분에 그 부분이 보이자, 피규어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이를 키리시마는 해명이라도 하는 거처럼 말했다.
“머리 고치려다가 그만 더 부숴버렸어.”
잘하는 짓이다, 진짜...
그리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키리시마를 걱정해줬다. 히우의 성격상 삐져있는 동안 키리시마를 무시할 게 뻔하고 이 기간이 얼마나 길지 상상되지 않았다. 다시 사준다고 해도 최소 한 달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현재로서 불가능이었다. 히우가 가지고 있던 저 피규어는 한정판으로 더 이상 인터넷에서 중고조차 구하기 힘든 것이었고 이를 키리시마도 알고 있어 더욱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자신이 도와줄 게 없다고 판단한 바쿠고는 그에게 책임을 혼자 지게하고 방을 나왔다.
무더운 한 여름임에도 집안은 서늘했다. 싸늘했다고 하는 표현이 더 맞을 정도로 키리시마를 향한 히우의 태도는 차가웠다. 저기 히우... 획 고개를 돌려 무시를 당했다. 히우! 아빠가 데쿠 인형 사 왔는데. 한 번 힐끔 쳐다보고 바쿠고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키리시마는 간절하게 바쿠고를 쳐다봤다. 그의 한심함에 바쿠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 좀 도와줘, 바쿠고....”
그날 저녁 바쿠고 자신과 자겠다는 히우를 억지로 재우고 제 방으로 들어와 키리시마의 옆에 누웠다. 두 사람의 싸움에 정작 피곤한 건 바쿠고였고,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키리시마는 도와달라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미안, 바쿠고... 모처럼 휴가인데.. 그는 키리시마를 등지고 옆으로 누워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데쿠.”
“응? 미도리야?”
“전화해보라고.”
바쿠고의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챈 키리시마는 표정이 밝아졌다. 바쿠고! 그의 조언에 감동을 먹어 키리시마는 그의 뒤에서 와락 안았다.
“고마워!!”
그리고 두 볼을 손으로 감싸 자신이 있는 쪽으로 조금 돌려 그의 입술에 짧게 제 입술을 부딪쳤다. 바쿠고는 놀라 얼굴이 빨개지며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으억. 그의 주먹에 침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지만 그래도 좋은지 실실 웃고 있었다. 드디어 해결책을 찾은 키리시마는 그동안 잠을 설쳤던 나날들은 잊고 바쿠고를 꼭 안고 단잠에 빠질 수 있었다. 바쿠고는 그의 팔을 뿌리치려다 이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음날 삐져있던 히우의 뒤로 조심히 다가가 눈치를 살폈다. 히우는 키리시마의 등장에 눈치를 채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그가 아이의 앞을 막아섰다.
“자, 잠깐! 아빠가 굉장한 걸 가지고 왔어. 히우가 엄청 좋아하는 거야.”
히우는 그 말에도 넘어가지 않고 옆으로 빠져나가려던 찰나 키리시마가 휴대폰을 꺼냈다. 미도리야, 잘 부탁해. 키리시마는 휴대폰에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히우에게 내밀었다.
“....뭐야?”
“일단 받아봐.”
키리시마의 행동에 히우는 어리둥절해하며 그가 내민 휴대폰을 받았다.
“여보세.”
[여보세요?]
그 목소리에 히우는 잠시 몸이 굳었다. 입조차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굳은 히우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자 휴대폰 속 스피커로 다시 한 번 더 말이 나왔다.
[여보세요?]
히우는 급한 마음에 소리치듯 말했다.
“사, 사인해주세요!!”
그 순간 정적이 흘렀고 히우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이를 미도리야가 매너 있게 대처했다.
[사인은 다음에 해줄게요. 그보다 히우, 제 팬이라면서요?]
“네네네!!! 엄청 팬이에요! 저, 저 데쿠 한정판 다 있어요! 아, 하나... 없어졌지만요.”
뜨끔. 키리시마는 근처에서 듣고 있다 가슴에 바늘 찔리는 기분을 느꼈다. 미도리야는 대충 키리시마를 통해 사정을 들어 그를 도와줄 말을 생각하곤 입 밖으로 내뱉었다.
[괜찮아요. 다음에 하나 구해 줄 테니까.]
히우는 방금까지 시무룩해있던 표정이 어디로 갔는지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대화가 오고 갔고, 미도리야의 일로 인해 10분이 지나서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히우는 키리시마에게 다가가 휴대폰을 건네며 그를 바라봤다.
“아빠! 바, 방금까지 나 데쿠랑 통화했어. 데쿠랑!”
아이의 반응을 보니 화가 풀린 거 같아 다행으로 여긴 키리시마는 맞장구를 쳐줬다. 좋았겠네. 히우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미도리야와 한 얘기를 세 시간째 늘여놓았다. 키리시마는 지치지 않는 딸의 모습에 역시 자신과 바쿠고의 자식이라며 좋아했지만 한편으론 멈췄으면 했다.
똑같은 얘기만 다섯 번째야. 도와줘, 바쿠고.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듯 바쿠고를 바라보자 바쿠고는 힐끔 쳐다보고는 혀를 내밀었다. 으아, 너무해. 그래도 귀여워... 하는 수 없이 히우의 자랑을 한 시간 더 듣고 나서야 끝이 났다.
***
바쿠고~. 아빠~. 닥쳐. 갑작스러운 에어컨의 고장으로 녹기 일보 직전인 키리시마와 땀을 흘리며 입을 벌리고 있는 히우, 짜증 지수 최대에 다다른 바쿠고가 선풍기 바람에 의존한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선풍기에도 사람의 체온이라는 게 있고 세 사람 다 옹기종기 앉아 있는 탓에 온도와 찝찝함을 더욱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먼저 터진 것은 바쿠고였다.
“씨발!!”
“바쿠고 히우 앞에서 그 욕은.”
“닥쳐. 더워 뒤지겠는데 그게 뭔 상관이야.”
키리시마는 괜히 더운데 그의 신경을 더 건드리지 않기 위해 화재를 전환했다.
“그럼 어디 가게라도 갈래?”
“아니. 가봤자 오래 못 버텨. 오래 버틸 수 있는 거기로 가야지.”
키리시마와 히우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바쿠고는 짧고 굵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바다.
에어컨의 영향이 컸지만 휴가로 차를 타고 모두 바다로 향했다. 모래 위로 발을 디디자, 바다 특유의 짠 냄새와 함께 파도 바람이 그들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히우는 옷 안에 수영복을 입고 차에 탄 덕분에 바다를 향해 뛰어가며 탈의를 시작했다. 야! 바쿠고가 말리려 했지만 이미 허물을 모두 벗고 바다에 입수한 상태였다. 저게 진짜. 히우를 향해 화를 내려던 그를 키리시마가 웃으며 말렸다.
“오랜만에 같이 놀러와 신나서 그런 거니까 봐줘, 바쿠고.”
“네놈 때문이잖아. 너의 그 개 같은 성격 때문에.”
“개 같다니.”
서로 의미 전달이 어긋나 키리사마가 상처를 입어 시무룩해있자, 바쿠고가 애써 수줍음을 숨긴 채 말했다. 개가 뭐 어때서. 좋기만 하구만. 키리시마는 그의 작은 말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들어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바쿠고. 뭐, 뭐.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 바쿠고를 향해 키리시마는 달려들어 그를 꼭 껴안고는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바쿠고는 고장 난 컴퓨터 마냥 말을 더듬으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키리시마가 말했다.
“나는 성질 더럽고 화날 때 무섭더라고 귀엽고 남자다운 바쿠고가 좋아.”
분명 뒷말은 좋았으나, 앞에 말이 거슬렸던 바쿠고는 그의 얼굴을 향해 주먹과 함께 폭발을 일으켰다. 뒤져!! 키리시마는 다급하게 바쿠고의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 그의 주먹을 맞고 뒤로 쓰러졌다. 그 상황을 바다에서 지켜보던 히우는 한숨을 내뱉었다.
“꼭 키리아빠는 마지막에 분위기를 망쳐. 그러니까 쿠고아빠가 화를 내지.”
듣지 않아도 그동안 봐온 기억들을 되짚어 눈으로 보이는 상황을 모두 이해한 히우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혼자라도 놀아야겠다.
어렸을 때, 바쿠고를 통해 배운 수영으로 바다를 헤엄치며 놀다 발끝이 겨우 닿는 부분에 멈춰 섰다. 그리고 잠시 갈등에 빠졌다. 뒤로 가 발이 닿는 곳에서 놀지, 더 앞으로 나아갈지 고민을 하다 이내 미소를 보이며 결론을 내렸다.
“쿠고아빠가 칭찬해 주겠지?”
히우는 자신을 대단하다고 칭찬해줄 바쿠고를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 상황을 모른 채 바쿠고와 키리시마는 아옹다옹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 히우가 힘이 들어 잠시 쉬고 있을 때쯤 바쿠고는 고개를 돌리다 우연히 저 멀리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바쿠고의 놀란 표정에 키리시마도 고개를 돌려 히우를 보곤 벌떡 일어섰다.
“히우!!”
그 자리에서 크게 외쳐보지만 아이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자신이 들어가겠다고 하는 키리시마의 손목을 바쿠고는 붙잡아 멈춰 세웠다. 왜? 얼른 들어가서 데리고 나와야지. 바쿠고는 아무 말없이 눈을 찌푸려 바다를 응시하더니 무언가를 보고 자신도 벌떡 일어났다.
“야, 사람을 얼른 대피시켜.”
“어, 어?? 갑자기 무슨 일인데?”
바쿠고의 표정은 무척이나 다급해 보였다. 그렇기에 바쿠고의 옆에서 같이 뛰어나가며 그에게 묻자 바쿠고는 짧게 설명했다.
“빌런.”
키리시마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 바다로 뛰어드는 바쿠고를 뒤로 한 채 해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대피하라 소리쳤다. 바쿠고는 폭발을 일으켜 아이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히우는 잠시 후 바쿠고가 자신이 있는 쪽으로 날아오고 있음을 인지해 반기듯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표정을 보고 이상함을 느꼈다. 무슨 일 있는 건가? 히우는 물속에 둥둥 떠 있는 채로 바쿠고를 불렀다. 바쿠고는 그런 히우를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피해!!”
“응? 피하다니?”
그제야 자신의 뒤를 돌아보자, 이미 검은 문어의 다리가 히우를 낚아챈 상태였다. 자신보다 100배 더 큰 대왕 문어같이 생긴 빌런의 문어발에 꼼짝없이 잡혀버린 히우는 불안과 더불어 극심한 공포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이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바쿠고는 문어를 향해 당장이라도 공격하고 싶었지만 히우까지 위험해 빠질 게 분명했기에 방법을 바꿨다. 자신의 딸이 붙잡혀있음에도 침착하게 대처하며 생각했던 방법을 실행에 옮겼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문어발을 차례차례 피한 후 빌런의 머리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딸이 납치되었음에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개성을 조절해가며 쓰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위에 발을 디뎠다. 생각보다 큰 머리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방해받기 전 머리가 있는 밑으로 두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큰소리로 외치는 것과 동시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의 최대 출력으로 폭발을 일으켰다.
“내 딸 내놔, 문어대가리 새끼야!”
한순간 빌런은 폭발이 몸을 휘감듯 그를 공격해 정신을 잃고 온몸에 힘이 빠졌다. 바쿠고는 물과 만나 생긴 수증기 속에서 히우를 발견하고 아이에게로 다가가 낚아채듯 한 손으로 안았다. 히우는 바쿠고의 옷을 꽉 잡고 그에게 안긴 채 안도감을 느꼈다.
다행히 해변에 있던 레드라이엇과 폭살왕 덕분에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이후 뉴스에 보도가 되었다.
***
히우는 연필을 똑바로 잡아 슥슥 종이 위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생님의 박수 몇 번에 반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자, 그럼 누구부터 발표해볼래요?”
주변의 눈치를 보며 가만히 앉아 있는 아이와 덜 쓴 아이 빼곤 모두가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히우는 팔을 계속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며 큰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외쳤다. 선생님은 그 목소리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며 히우의 이름을 불렀다. 히우는 활짝 웃으며 종이를 두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쓴 종이를 눈으로 읽고 그것을 소리로 내뱉었다.
“제가 좋아하는 히어로는 레드라이엇과 폭살왕입니다.”
히우가 다음 문장을 읽으려고 하기 전 옆에 앉아 있던 애가 태클을 걸었다.
“너 데쿠가 제일 좋다며. 그리고 두 히어로 너네 아빠잖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말을 끊은 그 아이를 쳐다보며 미소를 보였다. 입 다물어라. 바쿠고의 딸답게 그가 순간 겹쳐 보이는 건 뒤에 서 있던 키리시마뿐이었다. 참관하러 온 학부모와 옆에 있던 아이는 놀라 입을 꾹 다물자. 그제야 히우가 뒤를 이어 읽었다.
“평소 아빠들은 일하기 바빴고, 그래서 정작 저를 구해주지 못 했습니다. 제가 심심할 때나 배고플 때나 넘어졌을 때나. 모두 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빠들이 히어로인 게 싫었고 아빠들은 히어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의 히어로입니다. 제가 위험해 빠지면 구해주러 오는, 바로 달려와 주는 히어로! 그게 저의 쿠고아빠와 키리아빠입니다.”
히우는 종이를 내리고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아이의 발표가 끝이 나자 그곳에 있던 모두가 손뼉을 쳤다. 그와 함께 바쿠고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보였고, 키리시마는 조용히 훌쩍이고 있었다.
참관 수업이 끝이 나고, 중간을 히우로 해서 셋은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갔다. 키리시마는 헤벌쭉 웃으며 히우에게 물었다.
“히우, 레드라이엇 피규어 줄까?”
히우는 어리둥절하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필요 없어. 그 말에 상처를 받은 키리시마가 아까 발표를 엮어 아이에게 따졌다.
“아, 그거? 당연히 상 받으려고 그렇게 쓴 거지. 나 잘 썼지?”
어린아이의 동심을 파괴하듯이 히우의 말에 마음 한구석이 부서지듯 키리시마는 절망에 가깝게 표정이 어두워졌다. 바쿠고는 1등을 노리라고 매번 강조했던 탓에 자신의 딸이라면 그리 하리라 예상하고 있어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까의 그 미소도 감동의 미소가 아닌 잘 지었다는 뿌듯함과 작은 감탄의 미소였다. 히우는 실망해 풀이 죽은 키리시마를 보고 마음이 살짝 걸리는지 그에게 말했다.
“나한테 아빠들은 히어로가 아니야.”
“어!?”
“나한테 아빠는 아빠인걸.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빠.”
그 말을 이해한 바쿠고는 히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리시마는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좋은 거 맞....지?”
“하아, 병신.”
“아빠 바보.”
“너무해.”
키리시마의 반응에 히우는 키득키득 웃고는 허리를 숙여보라고 말했다. 그에 키리시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아이의 말대로 허리를 숙였다. 히우는 비밀인 거처럼 귀에다 속삭였다. 아빠가 제일 좋다는 뜻이야. 히어로를 포함하지 않은 상태에서라는 말을 빼놓은 채 그에게 말함과 동시에 볼에 뽀뽀를 하자 키리시마는 표정이 밝아졌다.
“쿠고아빠도!”
처음에는 튕기는가 싶더니 아이가 옷을 계속 잡아당기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품에 안았다. 히우는 방긋 웃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췄다.
“입에도 해도 돼?”
“하아?”
“아, 입은 아빠 꺼.”
“왜 키리아빠 꺼야? 내 꺼 할래.”
“내 입은 내 거다, 멍청이들아!”
걷는 동안 바쿠고의 입술 주인에 대해 얘기를 하다 집에 도착했다. 그날 폭살왕과 레드라이엇의 마지막 휴가 밤을 자신들의 딸과 함께 보내며 단잠에 빠졌다.